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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
2017년 9월 6일 18:00
삼.「에도코」란
(1)야마도쿄덴에 의한 「에도코」의 정의
「에도코」의 정의로서는 야마도쿄전(1761~1816)에 의한 것이 유명하고, 「에도성의 잉어를 보고 수도의 물을 산탕으로 했다」 「연월의 돈은 가지지 않는다」 「음식이나 놀이 도구가 사치다」 「생멋진 에도의 이야기누키」 「이키토하리를 본령으로 한다」라고 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에도코로 되어 있다.야마도쿄 전 지음 『통언 총마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일본 고전문학대계』 제59권 「황표지 세련된 집」 이와나미 서점 1958년)
「금의 물고기 호랑이(샤치호코)를 노리고, 수도의 물을, 산탕에 목욕(아비)해, 무릎원에 태어나서는, 오가미즈키의 쌀을 먹(쿠라), 유모 양산(온바히카라카사)에서 장(혼바히카즈사)도 비(히쿠키)로 하고, 요시하라 혼다의 하케 사이(아이)에, 아하카즈사)도 근시토스 스미즈(스미나하)의 고(시라우를)도 중락(나카오치)을 먹지 않고, 혼마치의 모퉁이 저택을 쳐 대문을 치(우울)는, 사람의 마음의 꽃에 비친다. 에도 롯코의 네생골(곤지야우보네), 만사에 건너는 일본 바시의 마나카(만나카)에서, 후려 보면 가미카제나, 이세마치(이세테우)의 신도에, 봉공 인구 입소와 이후간판(칸반)의 스무코후, 언제라도 흑격자에, 란노하치식(우에)의 나와 있는 것은・・・」
이러한 에도코의 조건을 최초로 읽었을 때는, 「수도의 물을, 산탕에 목욕해」라고 하는 부분에 눈이 멈추고, 왜 「수도」가 「에도코」의 요건이 되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이 점에 대해서는 나가이 하풍의 ‘우물의 물’(1876년)이라는 수필을 읽으면 그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수도는 에도 시대에는 상수(上水)로 띠어 멀리 명력의 옛날에 개통한 것은 사람이 아는 곳이다.가미미즈에는 다마가와 외에 간다 및 치카와의 이류가 있었던 것도 의설에 미치지 못한다.어릴 때 분, 오토바나 코히나타 근처의 인가에서는, 에도 시대의 간다 가미미즈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아울러 오늘과 끝이 지나고, 그 무렵의 수도를 사용하려면, 상수의 흐르고 있는 통의 곳에 우물을 파고, 대나무의 앞에 붙인 통으로 물을 퍼부은 것이다.
에도의 옛날에, 상수는 쿄바시, 양국, 간다 근처의 번화한 마을을 흐르고 있었을 뿐, 외로운 산의 손에서는, 토에바 요쓰야 또 세키구치 근처, 상수의 통로가 되어 있던 처에서도, 남으로 이것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그러므로 그대는 수도의 물로 산탕을 붙인 남자라고 말하자면 에도에서도 가장 번화한 시모마치에 태어나, 간다 묘진이 아니면 산노님의 씨가 되는 것이므로, 산의 손에 대해서 정수한 에도츠코의 자랑이 없었던 곳이다.(무카시에도라고 이헤바 수도가 통한 시모마치를 가리켜 말한 것으로, 코이시가와, 우시고메, 또 아카사카 아자부 근처에 살고 있는 것이, 시모마치에 용해 갈 때에는 에도에 가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이와나미판 전집 17-32)
(2)「에도코」 생성에 대한 고찰
이상의 나가이 하풍의 문장을 읽으면, 메이지의 초 무렵에서도, 「고이시가와, 우시고메, 또 아카사카 아자부 근처에 살고 있는 것이, 시모마치에 용하러 갈 때에는 에도에 가 온다고 했다」라고 하는 것이 풀린다자주 「잔디에서 태어나 간다에서 자란 에도코」등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원래는 간다나 잔디조차가, 「에도」라고 하는 지구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케다 야자부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니혼바시 사기』)
역사적으로 에도코란, 만약 장군의 무릎 아래 에도의 마을의 출생자가 되면, 지금의 중앙구의 구니혼바시, 쿄바시 구내의 사람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어, 극히 옛날에는 간다도 잔디도, 에도가 아니었다.물론 아사쿠사도 에도 밖이다.그러나, 시대와 함께, 잔디에서 태어나 간다에서 자란 사람도, 에도코가 되어 왔고, 가와향의 본소 후카가와도, 에도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금전에 대한 기질을 이야기해도, 에도의 혼마치를 중심으로 한, 상인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에는, 전월의 돈은 사용하지 않는 커녕 당당히 모은 사람들의 기질을 찾아야 한다.강석이나 낙어의 세계에 출몰하는 개념의 에도코로부터 기질을 끌어내는 것은, 위험이 많은 것이다.”
'에도코'에 대해서는 니시야마 마츠노스케 '에도코'(요시카와 히로후미칸, 1980년)라는 책이 위세를 갖추고 있지만, '평범사 대백과 사전'에 있어서의 다케우치 마코토(인용은 DVD-ROM 1998년판에 의한),
에도코라는 말은 18세기 후반의 다누마 시대(1760~86)가 되어 처음으로 등장한다.(필자주; 산도쿄전은 1761~1816)····그것에는 두 개의 계기를 생각할 수 있다.하나는 이 시기는 경제적인 변동이 심하고, 에도 마을 사람들 중에는 부자에 오르는 사람과 몰락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는 사람과의 교대가 현저하게 보였다. 아마, 이 몰락하고 있는 에도 마을인의 위기 의식의 터전=정신적 지주로서, 에도코 의식은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다누마 시대에는 에도에 지점을 가지는 상향의 대상들이 많이 돈을 벌고, 에도 경제계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있는 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방자」에의 반발은 컸다.・·····전월의 돈을 가져라”라고 버리는 것도, 돈벌이 잘하는 상향자에 대한 경제적 열등감의, 반전적인 강세로 보인다.
또 하나의 계기는 농촌에서는 먹을 수 없게 된 빈농들이 이 시기에 아직 전례없이 대량으로 에도에 유입된 것이다.그 때문에 에도에는 시골 출생이 많이 생활하게 되었다.게다가 이들 「시골자」가, 에도자만을 찌르는 것에 대해, 에도 태어난 어떻게의 강렬한 <미치>의식이 싹트었다.」
니시야마씨는, 「에도코라고 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계층에 의한 단순한 구조를 가지는 특정의 존재가 아니고,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라고 해, 「주로 화정기 이후에 출현해 온 「오라아 에도코다」라고 에도코 루 에도코」(자칭 에도코)와, 「니혼바시의 어강변, 키바의 재목상의 남편들, 영기시지마나 신카와계 쿠마의 술 도매상인이라고 하는, 모토로쿠 이전경부터 에도에 살고, 에도에서 성장해 온 오마치인 및 본격적인 제장인 제장인 제장인 제장인 제장인 제장인 문화를 가진 풍부한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라고 한다.
간사이인인 나는, 「에도코」라고 하는 말이라고 할까 인종에 대해 생리적 혐오감을 느끼고, 가이호 청릉(1755~1817)에 의한 「에도물은 소아의 화려하게, 바보인의 부드러움, 심한 초심이 된다」(승소담)라는 논에 공감, 동감해 왔지만, 「원래의 에도」라고 해야 할 니혼바시의 역사·문화를 알고, 처음으로, 「에도」, 「에도코」에 대해서, 반감이 없는 이성적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
[은조]
2017년 9월 6일 12:00
쇼와도리에 면한, 주오구립 지조바시 공원에,
『지요다구 간다 「류한가와 매립 기념」츄오구 니혼바시」라는 찰이 서 있습니다
![DSC07324 (400x225).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assets_c/2017/09/DSC07324%20%28400x225%29-thumb-400x225-47067.jpg)
여기가 주오구와 지요다구와의 구경으로, 중앙구립 지조바시 공원입니다.여기를 똑바로 나아가면 「후쿠다 이나리 신사」가 진좌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 남쪽의 쇼와길을 따라 육교 아래에, 파출소가 있어, 거기에서 서쪽을 향해 「본은 거리(HON-SHIROGANE-DORI)」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근처는 니혼바시 무로마치 4가로, 많은 기업이 활발하게 영업하고 있기 때문에, 음식점도 많습니다.
이 거리에서는, 「장인카미 니혼바시무로마치 본가」라고 하는 야키・샤부샤부・스키야키의 가게를 발견했습니다.니혼바시무로마치 4-6-5무로마치 CS 빌딩 B1F입니다.많은 육류 메뉴에서 점심을 선택했지만 공교롭게 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
![DSC07340 (400x225).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assets_c/2017/09/DSC07340%20%28400x225%29-thumb-400x225-47076.jpg)
친절한 점원이, 「저녁 5시부터 30분간, ¥500의 무제한 플랜이 있어요!」라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다음번에는 동료를 초대해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중앙도로까지 와서 안내판을 확인해 보았습니다.구경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DSC07363 (400x225).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assets_c/2017/09/DSC07363%20%28400x225%29-thumb-400x225-47073.jpg)
여기에서 중앙도리를 넘어 바로 오른쪽에 「가내 키이나리 신사」가 진좌되어 있습니다.안내판 사이에서 도리이가 보일까요?
![DSC07180 (400x225).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assets_c/2017/09/DSC07180%20%28400x225%29-thumb-400x225-47079.jpg)
여기를 똑바로 가면 왼쪽에는 소바의 명점 「무로마치 모래바」가 있습니다.(사진은 반대 방향에서 촬영)
「무로마치 모래바」는, 천진・하늘모리 발상의 가게와, 주오구 처음으로 이야기 맵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거기에는, 「「소바의 심만을 깎은 갱과가루를 계란으로 연결한 「천지」를 창안했다고 합니다.더운 여름이라도 튀김 소바를 먹기 쉽도록, 붙이면 모양으로 한 것이 하늘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
![DSC07176.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assets_c/2017/09/DSC07176-thumb-489xauto-47082.jpg)
무로마치 모래밭에서, 호리타 마루마사로 나아가면, 류한교의 곳까지 도달하네요.
![DSC07178 (400x225).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assets_c/2017/09/DSC07178%20%28400x225%29-thumb-400x225-47085.jpg)
달성감으로 충실한 2주간 걸린 투어였습니다.
[아스나로]
2017년 9월 6일 09:00
명력의 대화(1657년) 후에 파헤쳐진 인구의 운하 ‘용한천’이 있었습니다.
지요다구 오테마치 부근의 니혼바시가와에서 시작되어 고덴마초 부근 하마마치 강에 합류흐름은 직각으로 꺾어 하마마치 강으로서, 하마마치, 인형쵸, 하코자키를 거쳐 스미다가와로 흘러드는 것이었습니다.
![고엔 내.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E5%85%AC%E5%9C%92%E5%86%85.jpg)
이 강은 지요다 구와 주오구의 구계가 되어 1950년에 매립된 뒤 류한아동공원(지요다구), 용한아동 유원과 2개의 이름을 가진 공원이 생겼습니다.![](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mt-static/plugins/InsertIcon/images/cherry.gif)
![류한 아동 유원s.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E9%BE%8D%E9%96%91%E5%85%90%E7%AB%A5%E9%81%8A%E5%9C%92s.jpg)
공원 옆에는 에도나나모리의 한 회사인 다케모리 신사가 모시고 있습니다.![](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mt-static/plugins/InsertIcon/images/confident.gif)
![다케모리 신사.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E7%AB%B9%E6%A3%AE%E7%A5%9E%E7%A4%BE.jpg)
◆류한아동 유원/용한아동공원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코덴마초 19-5 / 지요다구 이와모토초 1-14-1
◆다케모리 신사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코덴마초 19-4
[CAM]
2017년 9월 5일 18:00
2.‘에도’의 성립과 범위
이렇게 해서 니혼바시 지구에서 한층 더 현 주오구의 역사를 접해 가는 동안, 지금까지 공부를 하지 않았던 「에도」의 성립 등도 알게 되었다.현 도쿄도 주오구의 전신인 니혼바시구·쿄바시구가 정식으로 성립·발족한 것은 1878년(1878)이지만, 그 직전에 만들어진 「구획 개정에 관한 하조서류」에 의하면, 거기에는 니혼바시구·교바시구의 명칭이 없고, 기타에도구·미나미에도구의 이름이 있다.즉, 원안자는, 니혼바시·쿄바시 양구의 지역을 「에도」라고 생각해, 이것을 남북 2개로 나누어, 키타에도구·난에도구라고 칭하려고 한 것이라고 한다.『츄오구사』는 「왕시, 간다 해리를 경계로 하고, 이남을 에도로 하고 이북을 간다로 했다」라고 하는 문헌(『재교 에도사코』『에도왕고 도설』)을 끌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1878년이 되어도 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덧붙여 주오구 성립 때(1947년)에도 신구명을 「에도구」 「오에도구」로 하는 방안도 유력했다고 한다.
원래, 「에도」의 어원은 「에처」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에」라고 하는 것은 해안으로부터 침투한, 배를 붙이기에 절호의 수역이다.이에야스공 「에도 오타기들이」(1590년:1590) 전의 동부의 평지는, 어디나 카시코도 「시오가리의 아시하라」이며, 이것을 축전하는 대토목 공사에 의해, 「에처」라고 해야 하는, 성의 전면의 마을이 대략 완성되었다.그 후 1593년(1593)에는 히비야 이리에가 묻혀 그곳에 흩어져 있던 민가는 시바구치의 남쪽으로 옮겨졌다.게다가 1603년(1603)에는 「도시마 스자키의 축전」이라고 불리는 대공사에 의해, 지금의 스미다가와 우안의 땅이, 하마마치에서 신바시 근처까지 완성된 것 같다.이 축전에 따라 시모마치의 굴할도 형태를 갖추어 니혼바시강, 교바시강, 신바시강도, 그리고 면목을 일신한 니혼바시도 이때에 생겼다고 생각된다.게다가 1657년(1657)의 큰 화재 이후, 기만초의 해안의 축전을 실시해, 이때 츠키지 일대가 완성되어, 구니혼바시구·교바시구의 큰체가 완성되었다.
따라서 ‘에도’라는 지역은 북쪽은 간다호리(용한천)를 한정으로 하고, 남쪽 경계는 신하시 강이었다. 이 신바시 강에 가설된 난바바시는 에도에서 추방당하는 사람의 추방점이 되고 있었다.그리고 신하시 강을 건너 잔디에 가면 그곳에 가네야스모토의 본점이 있었다.게다가 혼고 근처에 있는 고바시도 역시 에도 지불의 죄인을 추방하는 「이별의 다리」가 되어 있었지만, 그 혼고의 이별의 다리 근처에"도", 가네야스의 지점이 있었다. 이케다 야자부로 씨에 의하면, 「혼고도, 겐야스까지는 에도의 중」이라고 하는 가와야나기는, 이상과 같이, 에도의 남북의 「이별의 다리」의 어느 것에도, 그 근처에 겐야스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 생긴 것이며, 「혼고도」의 "도"는 그런 의미라고 한다(『니혼바시 사기』1972년)확실히 이케다 씨처럼 풀어줌으로써 "도"라는 구사가 살아 오는 것 같다.그리고, 그렇게 풀면, 「에도」라고 하는 지역을, 원래는, 「북쪽은 간다 호리(용한가와)를 한정으로 하고, 남쪽은 신바시강(시오도메가와)을 경계로 한다」라는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케다 야자부로씨는 “아마도 에도의 시모마치는, 산의 손에 대립하는 다운타운을 의미하는 호칭이 되기 전에는, 보다, 자랑스러운, 성의 무릎 아래, 에도의 성시, 시로타노 거리라는 의미였을 것이 틀림없다.에도의, 혼마치, 도리마치라고 하는, 생수의 에도, 에도의 마을의, 성시로서의 발상지라고 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시로 했다든가 성을 했다는 말은 특유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에도의 그 성이었던 마을이 한 마을이다.그러니까, 시작은, 에도의 시모마치는 아주 좁은 지역이며, 오카와 너머의 본소·후카가와는 아직 바다나, 습지대로서 마을을 이루지 않고, 간다도 에도의 소토, 아사쿠사에 이르러서는, 에도에서 옛부터 있었지만, 관음님의 몬젠초에서, 이치숙역과 같은 지구에 지나지 않았다.간다나 아사쿠사, 시모타니, 거기에 본소·후카가와까지가 시모마치가 되어 오는 것은, 계속 후의 일이며····”라고 말하고 있다(『니혼바시 사기』)
「에도의 범위」에 대한 막부의 정식 견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주인」(데라샤 봉행의 관할 범위), 「묵인」(마을 봉행의 관할 구역)이 제시된 것은, 1818년(1818)이기 때문에, 이에야스 입부 이래 230년 가까이 지난 후의 일이다.‘에도의 범위’에 대해 논할 때는 어느 시점, 어느 시점, 어느 단계에서의 이야기인지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그러나, 「에도 시대」라고 한마디로 논하거나 시대 초기의 사상에 대해서임에도 불구하고, 주링에 의한 영역을 당연한 전제이지만, 에도 시대 후기에 있어서의 사회 상황을 시대 전체에 대한 것 같이 말하는 문장이 있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하여(1603) 오마사 봉환되는(1867)까지의 사이에도 260년 이상에 이르고 있다.이것은 미국 독립선언(1776)부터 현재까지의 기간(240년)보다 길다.
(계속)
[다치마]
2017년 9월 5일 09:00
![IMGP0223.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IMGP0223.jpg)
이상 기상이 매일 여름방학, 역사를 좋아하는 6학년의 손자와 니혼바시가와~스미다가와~간다가와의 배여행입니다.이에야스가 개척한 발자취를 둘러봅니다
니혼바시 어강안터의 화장실을 사용해, 가교 100주년(2011년)을 계기로 만들어진 「니혼바시 선착장 후타주로 강변」에서 출항입니다.
【일본 하시카와】・・·천장에 손이 닿을 것 같은 거리로 다가오는 “에도바시”-1872년 창업가 “투구 다리”-“치바바시”-니혼바시 수문―“미나토바시”~스미다가와에 따르는 가와구치부에 가설 1698년 창가 “토요카이바시”를 지나면 하류 근처에 창가 1698년 근골 다카시 “영대교”입니다.
![도요카이바시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E8%B1%8A%E6%B5%B7%E6%A9%8B.JPG)
![IMGP0239.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IMGP0239.JPG)
【스미다가와】・・・스카이트리를 수면 정면에 물가의 경관을 즐기면서 운하선이 진행됩니다. 상류의 1979년 가교 「스미다가와 오하시」-1928년 준공 「기요스미바시」-오른손 오나키가와-1693년 창가 「신대교」-1659년 가교 당시 오하시의 호칭인 「료코쿠바시」・・・・.
1698년 창가 “야나기바시”를 뚫고 【간다가와】에 들어갔습니다.야가타선이 늘어서 에도의 배 놀이의 활기찬을 만졌습니다.
![야나기하시 간다가와.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E6%9F%B3%E6%A9%8B%E7%A5%9E%E7%94%B0%E5%B7%9D.JPG)
![니혼바시 5.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E6%97%A5%E6%9C%AC%E6%A9%8B%EF%BC%95.jpg)
구 히라카와 수로의【간다가와】를 명교 「성교」 「만세바시」 「오차노미즈바시」・・・와 지요다구, 분쿄구의 거리를 진행합니다. 고라쿠엔 앞을 부러져,-메이지기에는 파고로 외호가와라고 불린 니혼바시강을 진행하면 「치교」 「이치츠바시」 「니시키바시」, 이 사이의 성측 기시에는 에도성의 번의 각인이 있는 이시가키가 남아 있었습니다.
![도키와바시.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E5%B8%B8%E7%9B%A4%E6%A9%8B.JPG)
하류추오구, 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이시바시... 「조반바시」는 노후화와 동일본 대지진에 의해, 낙교의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개수 공사중.「이치이시바시」-「니시카와기시바시」를 진행해, 장식등주에 라이트가 켜지는 니혼바시 선착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니혼바시 사자 1.JPG](https://ko.tokuhain.chuo-kanko.or.jp/archive/2017/09/01/%E6%97%A5%E6%9C%AC%E6%A9%8B%E7%8D%85%E5%AD%90%EF%BC%91.JPG)
니혼바시에는 다리(8×4)를 따서, 32마리의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다든가...
다리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자의 맞이였습니다.
[CAM]
2017년 9월 4일 18:00
학창 시절에 신세를 졌던 어느 모임의 회지에, 지금까지의 블로그에의 투고를 정리해 기고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블로그에도 내보내 주세요.
이치.구니혼바시구와 오사카
(1)구니혼바시구와 나와의 만남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도쿄에 온 이래 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니혼바시 지구에 대해서는 거의 친숙하지 않았다.그리고 지난 십수년, 도쿄도 주오구(그 변방지대이지만)에 거주하게 되고 나서도 긴자 교바시 측에서 니혼바시 강을 건넌 지역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런데, 몇 년 전의 정월, 우연히 미코시 백화점이 주최한 「니혼바시 나나후쿠진 순회」가 되는 행사에 참가해, 구니혼바시구의 시가를 걸어 보고, 이상한 사냥감을 느꼈다.그 거리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니혼바시에서 태어나 자라, 「고향은 시골 사무라이에 붙어 옛 에도의 안주도 없음」이라고 읊은 타니자키 준이치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칸사이의 도시의 가로를 걸으면, 자신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게 해라.・・・・오사카의 타니마치, 타카츠, 시모데라마치베에 가면, 「아에 도쿄도 옛날은 이랬구나」라고 생각해, 잊고 있던 고향을 발견했을까 생각이 든다.」(‘내가 본 오사카 및 오사카인’ 첫 1932년)
오사카시 중심부에서 자란 자가, 시부야, 혼고 등의 시가에 대해 느끼는 위화감은, 언덕이 많은 것, 가로가 바둑판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오사카시 중심부인 선장, 시마노우치 지역 등의 구획은 히데요시가 조성한 채로가 남아 있어, 구획은 거의 바둑판이 되고 있다)오사카 시내에서는 (요도가와에서 흘러나온 토사의 해안에 의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우에마치 대지에의 언덕을 제외하면, 시가 중심지에 비탈은 없다.그리고 도쿄도 주오구내에도 (대부분은 매립에 의해 조성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언덕은 없다.
그런데 내가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오사카시 주오구)는 미도스지와 신사이바시스지에 면한 다이마루 백화점에 대해서 그 동서에 위치하고 있었다.따라서 나에게 '다이마루'는 백화점의 대표적인 존재이며, 도쿄역 야에스구치에 도쿄점을 개설한(1954년) 것은 전후가 되고 나서 도쿄로의 '(첫) 진출'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니혼바시에서 태어나 자란 하세가와 시우의 '가장 많이 나오는 거리의 기점에 다이마루라는 명사가 있다.이것은 정확히 현마 미코시 오복점을 가리키듯이, 그 당시의 니혼바시 문화, 번창지 중심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통유초의 맞은편의 모퉁이, 다이몬 거리를 사이로 네츠지에, 의연하게 우뚝 솟아 있던 대토조조의 유명한 오복점이었다.」(『구문니혼바시』 초판 1935년)라는 기술을 읽고 그 도쿄점은 예전에는 니혼바시를 대표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았다.
사이던스 테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면) 전철의 영향은 더 컸다.오복집의 다이마루 등 그 전형이다.현재의 백화점 중에는 과거의 오복 가게에서 발전한 예가 드물지 않지만, 다이마루도 그 중 하나로 18세기에 니혼바시에서 개업해 메이지 중반에는 미코시 등보다 번창하고 있었다.하세가와 시우도 쓰고 있듯이, 다이마루는 『정도 현재 미코시 오복점을 가리키듯이, 그 당시의 니혼바시 문화, 번창지 중심점이었다』.하지만 다이마루는 다른 가게와 달리 긴자에서 우에노로 빠지는 전철 거리에 면하지 않았다.거기서 점차 손님이 멀어지고, 메이지 말에는 도쿄의 가게를 접고 간사이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도쿄에 돌아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로, 다만 이번에는 교통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도쿄 역의 역 건물 안에 가게를 세운 것이다."(『도쿄시타마치 야마노테 (LOW CITY, HIGH CITY)』 원서 1983년)
(2)도쿄 니혼바시 지구와 오사카
이러한 것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주오 구내(니혼바시·긴자·쓰키지·아카시초 등)를, 그 역사 등을 생각하면서 산책하게 되었다.이것에 의해 구쿄바시 구내도, (내가 자란 무렵의 오사카시 중심부와 같이) 이전에는 삼십간 해자, 쓰키지강 등이 흐르는 「물의 도시」였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나루세 기키오 감독 영화에 그려진 쇼와 30년대의 긴자, 츠키지가와 주변의 풍정에는, 같은 시기의 오사카시 중심부와 공통되는 것을 느낀다(당시 오사카의 경제력은 도쿄에 비해 그다지 손색은 없었다고 생각한다.사테쓰 왕국 간사이 출신자에게는 당시의 이노카시라선 등은 시골 전철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고, 지하철 미도스지선을 익숙한 오사카인에게는 긴자선, 마루노우치선 등 당시의 도쿄 지하철은 상당히 빈약하게 느껴졌다)
전후의 잔토 처리 등을 목적으로 삼십간 해자가 매립된 것에 의해, 구 목만초당이 긴자와의 경계가 없어진 것, 이러한 것으로, 일대의 지명이, 긴자 서쪽·긴자 동쪽으로부터 한층 더 (긴자의 동쪽을 포함한다) 긴자 1~8가로 바뀌어, "긴자"라고 칭하는 지역이 널리 확대되고 있는 것도, 오사카 나가호리가와에 의해 매립 선장과 섬 안의 경계가 없어진 것, 오사카 신사이바시스지의 동서에 있는 꽤 넓은 지역이 히가시심사이바시·니시심사이바시라고 하는 지명을 칭하게 된 것과 같다.
이렇게 현 주오구의 역사 등을 조사함에 따라 주오구 성립시(1947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구니혼바시구가 신흥지구인 구쿄바시구와의 통합에 끝까지 저항했다는 사실(구 니혼바시구 지명의 머리에 니혼바시가 붙어 있는 것은 이러한 경위에 의한)도 알았다.거기에는 경제력에 있어서조차 "신흥"지역인 도쿄에 대한 집중에 압도되고 있는 간사이인의 심정과 공진하는 곳이 있다.
사이던스 테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혼바시는 오늘도 도쿄의, 나아가 일본 전체 금융의 중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일본은행도 증권거래소도 니혼바시에 있다.하지만 대기업은 대부분 니혼바시에서 다른 토지로 나갔다.미쓰이 은행이나 제일국립은행도...본점은 이제 니혼바시에는 없다」(『도쿄시타마치 야마노테』)
“1929년에 도쿄의 다채로운 곳을 조사한 기록이 있지만,···이 조사에서 이름이 오르고 있는 것은 긴자, 신주쿠, 우에노, 아사쿠사, 시부야, 거기에 인형초와 가구라자카이지만, 지금이라면 도쿄의 대표적인 다채로, 인형 마을이나 가구라자카를 꼽는 사람은 우선 있다.・・・・・・・
메이지 시대에는 크게 활기가 있었지만, 지진 재해 후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쇠퇴를 계속하고 있다.옛 니혼바시구의 대부분은 한때는 자타가 공인하는 에도초인 문화의 중심이었지만, 모두 같은 운명을 걸었다.인형 마을로 해도 옛 시타마치의 모습을 탐방하려면 모양의 곳에서는 있지만, 사람이 모인다는 점에서는 신주쿠와 같은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일어서는 도쿄(Rising Tokyo)』 원서 1990년)
야다 주오 구장은 “니혼바시에서 대기업 본사 기능의 전출이 시작된 것은 쇼와 50년대 전반의 일이다.유통기구의 변화가 외쳐 니혼바시에 집적되어 있던 다양한 도매상에 그늘이 느껴지게 된 것은 50년대 후반이다.・그리고 1998년 이후에는 거품경제의 붕괴와 금융 재편의 흐름 속에서 일본은행 주변에서 지방은행 등 금융기관이 사라져 갔다.・이러한 변천과.. 변화에 의해 어느 때인가 누구 말도 없이 '니혼바시의 지반침하'가 속삭여지게 된 것이다"(「니혼바시 르네상스」2007년)라고 말하고 있다. 이 야다 구장의 서술 등, 「니혼바시」의 부분을 「오사카시(츄오구)」로 바꿔도 그대로 통용되는 것은 아닐까.
그 도쿄 니혼바시 지구이지만 최근에는 재개발 계획이 차례로 완성되어, 재흥에의 움직임이 현저한 것은 기쁘다.또, 도쿄·니혼바시의 노포 상점의 유지가 런던 굴지의 상업지 메이페어와 제휴해 판로 개척이나 관광객 유치로 공동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는 움직임도 듣는다.금융가 가도초 근처 재개발의 기운도 높아져 온 것 같다.주오구는 외국계를 포함한 금융 관련 기업 등을 유치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수립할 것으로 알려졌다.최대의 상징적 사업은 니혼바시를 지나 경관을 파괴하고 있는 고속도로의 지중화이겠지만, 어떻게든 훌륭하게 실현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오사카 경제의 지반침하가 전혀 멈추지 않고, 가속조차 하고 있는 것 같기는 슬프고 쓸쓸하다.다시 만국박이 성사된다고 해도 이를 중장기적인 재흥으로 연결해 나갈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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