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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바시」, 「에도」 그리고 「에도코」(1)

[CAM] 2017년 9월 4일 18:00

학창 시절에 신세를 졌던 어느 모임의 회지에, 지금까지의 블로그에의 투고를 정리해 기고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블로그에도 내보내 주세요.     

 

이치.구니혼바시구와 오사카

 
(1)구니혼바시구와 나와의 만남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도쿄에 온 이래 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니혼바시 지구에 대해서는 거의 친숙하지 않았다.그리고 지난 십수년, 도쿄도 주오구(그 변방지대이지만)에 거주하게 되고 나서도 긴자 교바시 측에서 니혼바시 강을 건넌 지역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런데, 몇 년 전의 정월, 우연히 미코시 백화점이 주최한 「니혼바시 나나후쿠진 순회」가 되는 행사에 참가해, 구니혼바시구의 시가를 걸어 보고, 이상한 사냥감을 느꼈다.그 거리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니혼바시에서 태어나 자라, 「고향은 시골 사무라이에 붙어 옛 에도의 안주도 없음」이라고 읊은 타니자키 준이치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칸사이의 도시의 가로를 걸으면, 자신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게 해라.・・・・오사카의 타니마치, 타카츠, 시모데라마치베에 가면, 「아에 도쿄도 옛날은 이랬구나」라고 생각해, 잊고 있던 고향을 발견했을까 생각이 든다.」(‘내가 본 오사카 및 오사카인’ 첫 1932년)

오사카시 중심부에서 자란 자가, 시부야, 혼고 등의 시가에 대해 느끼는 위화감은, 언덕이 많은 것, 가로가 바둑판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오사카시 중심부인 선장, 시마노우치 지역 등의 구획은 히데요시가 조성한 채로가 남아 있어, 구획은 거의 바둑판이 되고 있다)오사카 시내에서는 (요도가와에서 흘러나온 토사의 해안에 의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우에마치 대지에의 언덕을 제외하면, 시가 중심지에 비탈은 없다.그리고 도쿄도 주오구내에도 (대부분은 매립에 의해 조성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언덕은 없다.

  그런데 내가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오사카시 주오구)는 미도스지와 신사이바시스지에 면한 다이마루 백화점에 대해서 그 동서에 위치하고 있었다.따라서 나에게 '다이마루'는 백화점의 대표적인 존재이며, 도쿄역 야에스구치에 도쿄점을 개설한(1954년) 것은 전후가 되고 나서 도쿄로의 '(첫) 진출'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니혼바시에서 태어나 자란 하세가와 시우의 '가장 많이 나오는 거리의 기점에 다이마루라는 명사가 있다.이것은 정확히 현마 미코시 오복점을 가리키듯이, 그 당시의 니혼바시 문화, 번창지 중심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통유초의 맞은편의 모퉁이, 다이몬 거리를 사이로 네츠지에, 의연하게 우뚝 솟아 있던 대토조조의 유명한 오복점이었다.」(『구문니혼바시』 초판 1935년)라는 기술을 읽고 그 도쿄점은 예전에는 니혼바시를 대표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았다.

사이던스 테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면) 전철의 영향은 더 컸다.오복집의 다이마루 등 그 전형이다.현재의 백화점 중에는 과거의 오복 가게에서 발전한 예가 드물지 않지만, 다이마루도 그 중 하나로 18세기에 니혼바시에서 개업해 메이지 중반에는 미코시 등보다 번창하고 있었다.하세가와 시우도 쓰고 있듯이, 다이마루는 『정도 현재 미코시 오복점을 가리키듯이, 그 당시의 니혼바시 문화, 번창지 중심점이었다』.하지만 다이마루는 다른 가게와 달리 긴자에서 우에노로 빠지는 전철 거리에 면하지 않았다.거기서 점차 손님이 멀어지고, 메이지 말에는 도쿄의 가게를 접고 간사이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도쿄에 돌아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로, 다만 이번에는 교통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도쿄 역의 역 건물 안에 가게를 세운 것이다."(『도쿄시타마치 야마노테 (LOW CITY, HIGH CITY)』 원서 1983년)

 
(2)도쿄 니혼바시 지구와 오사카

이러한 것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주오 구내(니혼바시·긴자·쓰키지·아카시초 등)를, 그 역사 등을 생각하면서 산책하게 되었다.이것에 의해 구쿄바시 구내도, (내가 자란 무렵의 오사카시 중심부와 같이) 이전에는 삼십간 해자, 쓰키지강 등이 흐르는 「물의 도시」였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나루세 기키오 감독 영화에 그려진 쇼와 30년대의 긴자, 츠키지가와 주변의 풍정에는, 같은 시기의 오사카시 중심부와 공통되는 것을 느낀다(당시 오사카의 경제력은 도쿄에 비해 그다지 손색은 없었다고 생각한다.사테쓰 왕국 간사이 출신자에게는 당시의 이노카시라선 등은 시골 전철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고, 지하철 미도스지선을 익숙한 오사카인에게는 긴자선, 마루노우치선 등 당시의 도쿄 지하철은 상당히 빈약하게 느껴졌다)

전후의 잔토 처리 등을 목적으로 삼십간 해자가 매립된 것에 의해, 구 목만초당이 긴자와의 경계가 없어진 것, 이러한 것으로, 일대의 지명이, 긴자 서쪽·긴자 동쪽으로부터 한층 더 (긴자의 동쪽을 포함한다) 긴자 1~8가로 바뀌어, "긴자"라고 칭하는 지역이 널리 확대되고 있는 것도, 오사카 나가호리가와에 의해 매립 선장과 섬 안의 경계가 없어진 것, 오사카 신사이바시스지의 동서에 있는 꽤 넓은 지역이 히가시심사이바시·니시심사이바시라고 하는 지명을 칭하게 된 것과 같다.

이렇게 현 주오구의 역사 등을 조사함에 따라 주오구 성립시(1947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구니혼바시구가 신흥지구인 구쿄바시구와의 통합에 끝까지 저항했다는 사실(구 니혼바시구 지명의 머리에 니혼바시가 붙어 있는 것은 이러한 경위에 의한)도 알았다.거기에는 경제력에 있어서조차 "신흥"지역인 도쿄에 대한 집중에 압도되고 있는 간사이인의 심정과 공진하는 곳이 있다.

사이던스 테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혼바시는 오늘도 도쿄의, 나아가 일본 전체 금융의 중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일본은행도 증권거래소도 니혼바시에 있다.하지만 대기업은 대부분 니혼바시에서 다른 토지로 나갔다.미쓰이 은행이나 제일국립은행도...본점은 이제 니혼바시에는 없다」(『도쿄시타마치 야마노테』)

“1929년에 도쿄의 다채로운 곳을 조사한 기록이 있지만,···이 조사에서 이름이 오르고 있는 것은 긴자, 신주쿠, 우에노, 아사쿠사, 시부야, 거기에 인형초와 가구라자카이지만, 지금이라면 도쿄의 대표적인 다채로, 인형 마을이나 가구라자카를 꼽는 사람은 우선 있다.・・・・・・・

메이지 시대에는 크게 활기가 있었지만, 지진 재해 후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쇠퇴를 계속하고 있다.옛 니혼바시구의 대부분은 한때는 자타가 공인하는 에도초인 문화의 중심이었지만, 모두 같은 운명을 걸었다.인형 마을로 해도 옛 시타마치의 모습을 탐방하려면 모양의 곳에서는 있지만, 사람이 모인다는 점에서는 신주쿠와 같은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일어서는 도쿄(Rising Tokyo)』 원서 1990년)

야다 주오 구장은 “니혼바시에서 대기업 본사 기능의 전출이 시작된 것은 쇼와 50년대 전반의 일이다.유통기구의 변화가 외쳐 니혼바시에 집적되어 있던 다양한 도매상에 그늘이 느껴지게 된 것은 50년대 후반이다.・그리고 1998년 이후에는 거품경제의 붕괴와 금융 재편의 흐름 속에서 일본은행 주변에서 지방은행 등 금융기관이 사라져 갔다.・이러한 변천과.. 변화에 의해 어느 때인가 누구 말도 없이 '니혼바시의 지반침하'가 속삭여지게 된 것이다"(「니혼바시 르네상스」2007년)라고 말하고 있다. 이 야다 구장의 서술 등, 「니혼바시」의 부분을 「오사카시(츄오구)」로 바꿔도 그대로 통용되는 것은 아닐까.

그 도쿄 니혼바시 지구이지만 최근에는 재개발 계획이 차례로 완성되어, 재흥에의 움직임이 현저한 것은 기쁘다.또, 도쿄·니혼바시의 노포 상점의 유지가 런던 굴지의 상업지 메이페어와 제휴해 판로 개척이나 관광객 유치로 공동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는 움직임도 듣는다.금융가 가도초 근처 재개발의 기운도 높아져 온 것 같다.주오구는 외국계를 포함한 금융 관련 기업 등을 유치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수립할 것으로 알려졌다.최대의 상징적 사업은 니혼바시를 지나 경관을 파괴하고 있는 고속도로의 지중화이겠지만, 어떻게든 훌륭하게 실현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오사카 경제의 지반침하가 전혀 멈추지 않고, 가속조차 하고 있는 것 같기는 슬프고 쓸쓸하다.다시 만국박이 성사된다고 해도 이를 중장기적인 재흥으로 연결해 나갈 수 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