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키 우 조지

주오구를 덮친 근대 지진

■ 이달 들어 NHK에서는, 「체감 수도 직하형 위크」라고 제목을 붙여, 드라마나 재해 상정을 섞어, 방재·감재의 필요성을 말하는 프로그램을 특집하고 있었습니다.거기에는 현대적인 재해가 그려져 전해지고 있고, 보고 있고, 아무것도 대비하지 않는 자신에게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큰 피해를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그래서 이번에는 주오구를 덮친 근대의 2개의 지진을 거론하고 다시 한번 재해의 두려움을 되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자료는 2018년 10월~12월에 중앙구립 향토 천문관에서 개최된 특별전 “재해사로부터 보는 주오구”로부터 인용했습니다.

(1)메이지 도쿄 지진

■ 1894년(1894년) 6월 20일, 메이지 연간 최대의 지진이라고 불리는 난칸토 직하형의 대지진(규모 7.0)이 도쿄에서 발생했습니다.“화재는 에도의 꽃”이라고 야유되어 온 화재 도시로부터의 탈각을 목표로 근대화로 돌진하는 도중, 내화 건축으로서 늘어나고 있던 벽돌 구조나 토조가 아다가 되어, 많은 건물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많았던 피해는 벽돌 굴뚝이었습니다.도쿄 시내에 있던 벽돌 굴뚝의 과반수(376개)가 무너졌습니다.

 

■ 도쿄시 중에서도 니혼바시구 내의 피해는 크고, 당시의 조사에 의하면, 전 시내의 파손 도괴 건물 3996채 중, 니혼바시구의 가옥은 849채로 가장 많았고, 교바시구에서도 569채였습니다.

 이 대지진으로, 만하안(통이치쵸메;현 니혼바시 잇쵸메)에 늘어서 있던 토조의 대부분이, 지붕 기와나 벽이 무너져 내리는 등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또 츠키지 주변도 이 지진에 의해, 츠키지 거류지 37번(현 아카시초)에 있던 입교 학교 교사 3층 부분이나 중앙의 탑이 도괴해, 니혼바시구·교바시구내에서 유일한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주오구를 덮친 근대 지진

▲ 도조의 벽이 무너진 니혼바시니시 강변(현 야에스 잇쵸메·니혼바시 잇쵸메)의 모습

(『지진재 예방조사회 보고 제4호』1895년부터)

 

 주오구를 덮친 근대 지진

▲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릿쿄학교 교사

(릿쿄학원 역사자료센터)

(2)간토 대지진

(2)간토 대지진 주오구를 덮친 근대 지진

▲ 간토 대지진 때 피난 장소와 사망자

(사이타마 대학 대학원 이공학 연구과 니시다 유키오씨 제공)

■ 1923년(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사가미만을 진원지로 하는 난칸토 지진은, 매그니튜드 7.9의 거대 지진으로, 관동 일원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 사망자·실종자는 전체로 10만 5000여명, 전괴·반괴·소실·유실 가옥은 37만동 이상으로, 희생자의 90% 가까이가 화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여러 지역에서 불을 동반한 맹렬한 바람(화재 선풍)이 발생하여 급속한 연소 피해를 일으킨 것입니다.불길이 바탕으로 소실된 지역도 많아, 쓰키시마는 200~300m의 스미다가와를 넘은 비상 때문에 소실했습니다.

 또한 이 지진에서는 근거가 없는 유언이 난무하고, 조선인에 대한 박해 등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오구를 덮친 근대 지진

▲ 에엽서 니혼바시 일대의 불탄터

 

 주오구를 덮친 근대 지진

▲ 그림엽서 제도 대지진의 참상 교바시에서 긴자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