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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키초

'모노시리 백과'의 권말에 '구 마을 이름의 유래'라는 기사가 있어, '주거표시에 관한 법률'(1962년 5월)의 시행에 의해 개편·소실한 '구 마을명'을 거론해 그 시기와 유래 등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구마치명」인 「긴자 동쪽」에 대해서, 「전후의 잔토 처리 등을 목적으로, 긴자의 동쪽에 위치하는 키만마치와 긴자 사이에 흐르고 있던 굴할(삼십간 호리카와)이 매립되었다, 이것에 의해 긴자가 계속 되어, 긴자의 서쪽의 마을명 「긴자 서쪽」에 대해서, 키마치를 「긴자 동쪽」라고 개칭해 1~8가를 기립했다.」라고 설명되고 있다.

 이것만을 읽으면, 「기만마치」라고 하는 「구들마치나」가, 얼마나의 확대와 역사를 가지고 있던 것인가를 이해할 수 없다.

 다만, 「모노시리 백과」(2018년 10월 발행) 중에서는, 51페이지에, 사쿠마 쇼산의 병학학원이 고비초 5가(현재의 긴자 6가) 부근에 있던 것, 가노 화학원의 하나가, 기마치, 현재의 긴자 5가에 있었던 것이 언급되고 있다.그리고 가부키자가 현재의 긴자 4초메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모노시리 백과」를 주의 깊게 읽으면, 이 「키만마치」라고 하는 「구들마치나」는, 좁은 지역에 대한 것이 아니라, 꽤 광대한 지역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만초」는 「모노시리 백과」197쪽 「츄오구 주거 표시 실시 약도」에 있는 「긴자 동쪽」의 전체, 북쪽은 쇼와도리를 쿄바시와 긴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수도고 아래(키마치 1가)에서, 남쪽은 시오루의 앞의 역시 수도고 아래의 츠바나바시의 교차점(키만초 8가)까지, 동쪽은 수도고가 달리는 구 츠키지강에서, 서쪽은 현재 미하라바시의 교번이 있어, 한때 미하라바시가 걸려 있던 삼하라바시가 걸려 있던 삼원간 호리카와까지, 1가에서 8가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나타내는 마을명이었다.

 현재의 신바시 연무장은 고비키초 6가(현; 긴자 6가), 현재의 긴자 브로섬 소재지는 키비치초 2가였다.

 이 키비키마치라고 하는 「구마다마치명」변경(1951년)의 경위에 대해서는, 사이던스테커씨가 자세히 말하고 있다(『서아서가는 도쿄』)

“긴자의 동쪽 뒷길은 그다지 활기차지 않았다.삼십간 해자가 쇼치쿠계의 오락가와 긴자 사이를 건너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운하도 1950년경에는 완전히 매립되어 그 땅에 여러 가게가 열렸다.파친코 가게, 술집, 캬바레, 그리고 스트립 오두막까지 생긴다.

삼십간 해자 매립은 또 당초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매립 덕분에 긴자의 동쪽에 있던 오락거리가 긴자와 가까워져 이윽고 긴자 안에 흡수되어버린 것이다.

"1965년경의) 마을명 변경에 저항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성공을 보지 못했다.때로 주민 내부에서 의견이 갈린 사례도 적지 않다.긴자의 동쪽에 있는 키비치마치는 지금도 가부키자()가 세워져 있지만 에도의 연극의 역사에서는 시내 어디에도 못지않게 중요한 마을이었다.역사를 중시하고 꿈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은 이 이름을 남기고 싶었지만, 장사인이나 기업인은, 「긴자」라고 하는 이름을 넣는 것이 장사에는 편리하다고 생각해, 결국, 「키만마치」는 사라지고 「긴자 동쪽」이 되었다(실은 이것은, 마을명·번지의 합리화가 조직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이야기로, 이 새로운 「합리화」의 결과, 지금은 「동」까지 없어져, 일대는 단순한 「긴자」로 바뀌고 있다).

 '모노시리 백과'에서도 설명된 바와 같이, '긴자 니시'라는 '구 지명'은 1930년부터 1968년까지 사용된 것에 반해, '긴자 동쪽'이라는 '구 지명'은 1951년부터 1969년까지 사용된 것에 지나지 않고 '모노시리 백과', '구정 이름의 유래'로 꼽힌 다른 '구지명'이란 조금 역사적 경위를 달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