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카

우키요코지노모모가와

“모가와루 번영노 그림” 우타가와 도요쿠니(3세)  도쿄도립 도서관

에도시대 중기, 마을인 문화의 기초가 만들어진 메이와·야스나가(1760~70) 무렵, 니혼바시 세토모노마치의 우키요 코지에 모모가와 시게사에몬요리차야 “모쿠가와”를 열었습니다.처음에는 「탁구요리」집이었습니다.「탁구」란 식탁에 거는 테이블보로, 그것을 건 식탁을 탁구대, 거기에 나오는 요리를 탁구요리라고 불렀습니다.중국에서 나가사키에 전해진 것으로 큰 접시에 담긴 요리를 식탁의 중심에 두고, 메이메이가 나눠 먹는 스타일이었습니다.위의 도요쿠니 우키요에에서도 큰 접시를 옮기는 여성이 그려져 있습니다.한즙 삼채를 기본으로 개별적으로 세트된 밥상 요리를 먹는 습관의 일본인에게는 큰접시 요리는 신기하게 번성했습니다.그러나 질리는 것도 빨리 시류를 가진 모모가와는 손님의 취향에 맞추어 일본 요리도 시작해 순식간에 유수한 요리 찻집이 되었습니다.

에도 시대의 일류 요리점은 목욕탕이 붙어 있었습니다.모모가와도 물론 목욕탕이 있었습니다.도착하면 우선 목욕을 하고 맛있는 요리를 받았다고 합니다.중요한 요리의 가격은?가이석 요리로 100(히키)150개, 200개의 3단계1개는 10문장.장인의 하루 벌이는 것이 300~500문이라 싸지는 않지만 키울 정도였습니다.그래서, 상인들의 후계자의 피로목이나 구가의 결혼 피로연, 친화의 장소, 후쿠토쿠 신사에서의 기원 직회의 장소가 되는 등 번성했다고 합니다.

에도의 일류 요정으로서 가장 유명한 가게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아사쿠사에서 개업한 야조선(현재는 「야조 선우즈키소」로서 요코하마시 이소고구에서 영업)입니다만, 야조선과 모모가와 모두 문인 묵객에게 사랑받은 요정이었습니다그러나 양자의 제일의 차이는 햐쿠카와는 문인 묵객의 살롱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예를 들면 오타 미나미는 「야마테련」을 만들고 야마도쿄전, 야마도쿄산, 야분조 등과 함께 광가의 모임을 개최하거나 세상이나 풍속, 문예 등의 분야에 대해 말한 기록을 했습니다.그 밖에는 타니 분조, 마츠다이라 사다노부, 이노 타다타카, 사쿠마 쇼산, 요리야마 요, 사카이 호이치 등 쟁쟁한 멤버도 다니고 있었습니다.

또, 그림사의 가가와 쿠니사다(토요쿠니)가가와 히로시게도 출입하고 있었습니다.모모가와의 당주 모모사에몬은 후계자로서 고토 토라타로를 양자로 맞이하고 있었습니다만, 모모사에몬은 서화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입양한 토라타로의 그림의 재능을 간파해, 모처럼 양자로 맞이하고 있던 토라타로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가가와 히로시게의 제자로 해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습니다.토라타로는 훌륭하게 3대째 히로시게로서 활약했습니다.가게를 위해 취한 입양인의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실현해 준다니 좀처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모모카와 시게사에몬의 인품이 좋은 점이 나타난 에피소드에 느꼈습니다.

구로후네가 왔다

구로후네가 온 우키요코지의 모모가와

‘무주 요코하마 어응접소 향응지도’ 일부 요코하마 시립 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가에가 6(1853)년 쿠로후네 4척을 이끌고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페리는 개국을 찾아 대통령의 친서를 건네주고 다음 해 회답을 받으러 올 것을 고하고 돌아갔습니다.다음 해 7척의 흑선으로 나타난 페리는 조약 체결을 멈춥니다.약 한 달의 협의 끝에 조약 체결하게 되었습니다.그때 접대 요리 일체를 맡은 것이 햐쿠카와였습니다.미국 측 300인분 접대하는 일본 측 200인분본선 요리를 하는 주문이었습니다.혼젠 요리는 무가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요리입니다.페리 일행이 대접을 받고 있는 그림에 있듯이 다리가 붙은 밥상에 요리를 늘어놓아, 밥상, 삼선과 여러 가지 늘어서 갑니다이때의 요리는 약 90종.과자 3종깜짝 놀랄 만한 수가 줄었습니다.500인분으로 현재의 금액으로 1억 5천만엔 정도 걸리는 대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과자 3종은·새우당·시라이시바시 향(시로샤쿄코)·미정라(카스테라)였습니다.첫 번째 새우 당은 홍백의 줄무늬 유평당.두 번째 시라이시바시향은 낙안과 같은 간과자로 노의 연목 「이시바시(샤키요)」에 연관된 것 같습니다.이시바시는 피어 자랑하는 모란 사이를 흰색과 빨강의 사자가 춤추는 노의 연목 속에서는 움직임이 있는 보고 있어 즐겁고 매서운 연목입니다.아마 모란이나 사자의 모양을 본뜬 간과자였던 것은 아닐까요.단, 페리 일행에서 능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간과자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세 번째 미스정라는 카스텔라입니다.미국인은 이것이 가장 맛있었을지도 모른다.무게 약 170그램으로 컸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먹기보다는 선물로 하는 것을 상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 측으로서는 온갖 군살을 다한 이 요리도 회, 흡입, 조림, 구이었기 때문에 맛이 진한 볼륨이 있는 고기 요리에 익숙한 미국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맛있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통역으로 와 있던 새뮤얼 웰즈 윌리엄은 『페리 일본 원정 수행기』에 일본식에 대해 짠맛이 얇고, 비용을 들인 것은 아니라거나 몹시 말을 하고 있습니다.입맛에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햐쿠가와는 어디로?

페리를 대접한 그 해에 햐쿠카와는 벌써부터 테이블석의 외국인 전용 식사실을 마련해 서양식으로 쇠고기 요리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유행을 잡는 것이 능숙한 모모가와군요.

그러나 왠지 모르게 햐쿠카와는 사라집니다.메이지 유신 후서물에도 요리집 번부에도 모모가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메이지 초기부터 1965년까지 모모가와 옆에 나쿠라야라는 큰 여관이 있었습니다.그 여관이 햐쿠카와의 부지를 인수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모모가와가 그 때 이전했는지 그대로 폐업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또한 메이지 유신 후의 도쿄에는 많은 서양요리점이 탄생하여 과당 경쟁을 견디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일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제일의 원인으로서 진지하게 속삭여지고 있는 것은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끝나 페리 일행에게의 요리 대금을 지불해 주지 않고 큰 부채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페리의 응향을 거절했다면 지금도 계속되는 노포가 되어 있었을까요?……그때그때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 온 모모가와에게 일생일대의 페리에게 대접을 거절할 선택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키요코지에서 본 후쿠토쿠신사

우키요코지에서 본 후쿠토쿠 신사 우키요코지의 햐쿠카와

니혼바시 미쓰코시 본점 맞은편, 코레도무로마치와 YUITO 사이의 길이 우키요코지입니다.사진은 우키요 코지에서 후쿠토쿠 신사 방향을 찍은 것입니다.

에도시대 우키요 코지의 「코지」는 「고지」가 아니라 「쇼지」라고 읽었습니다.그것은 우키요 코지에 거주하고 있던 마을 노인의 키타무라가의 출신이 가나자와이므로 가가류에 읽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부요’라고 하는가?이 고지에 돌다미를 닮은 모양에 짜넣은 「부세 돗자리」를 취급하는 가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지금의 우키요 코지도 돌다미와 같은 모양이 되어 있네요부요코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후쿠토쿠 신사는 헤이안 시대에 이미 진좌하고 있어 이에야스도 참배에 방문해 2대 장군 히데타다도 신앙하고 있던 유서 깊은 신사입니다.따라서 햐쿠가와를 방문하는 손님도 후쿠토쿠 신사에 참배하고 나서 요정에 가는 것이 관례가 된 것 같습니다.

 우키요코지노모모가와

후쿠토쿠 신사 앞의 「후쿠토쿠 신사 광장」에 「혼마치도리와 마을 연기키타무라가」와 「우키요코지와 요정 백천」에 대해 설명한 안내판이 있습니다.사진의 파란색→입니다.

【참고 문헌】

『환상의 요테이・니혼바시 「모모카와」」 고이즈미 다케오 신쵸샤

『화과자를 사랑한 사람들』 도라야 문고 야마카와 출판사

『페리 일본 원정 수행기』 새뮤얼 웰즈 윌리엄 유마쓰도 서점

『사라진 요테이 『백천』을 쫓다』 치쿠고노리 닛케이 신문 2014년 7/3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