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오구 역사소요 <4>가모마부치 사후 250년 2~“국학 발상지” 간다 묘진~
하마마치에 현 거처를 세운 카모마부치는 26세에 하타 하루만(카다노 아즈마로)로부터 국학이나 와카, 유학 등을 배웠다.41세 때 에도에 나가, 간다 묘진의 신주에게 기우했다.현재 신사 경내에 「국학 발상지」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사전을 향해 우측에 있다.
‘국학 발상지’ 비
비의 찬문은 지금 동광(東光, 1898-1977)에 의한다.그는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유행 작가로서 활약 외에 승적에 들어가 중존지 관주를 맡는다.참의원 의원도 역임했다.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는 필자주
「가타 히가시마루[춘만]은 후시미이나리 사가에서 태어나, 1700년[1700]에 에도에 시모카타, 1722년[1722]까지 재부한다.그동안 곳곳에서 강설, 가회를 연다그 강석은 당사[간다 묘진]신주 시바자키 저택이며, 후에 양자재만이나 고제로 하마마츠의 사람·오카베 미사[가모] 마부치도 이 저택을 빌렸다시바사키 신주는 역대, 스스로 배우는 것과 동시에, 사토마루를 위해서 학원의 장소를 제공해 국학 진흥에 기여했다.이 히가시마루가 나오고 우리 국학은 가모 마부치, 혼고 선장과 전통하여 오늘로 전해진다.”
가모 마부치는 그 후, 니혼바시 고부나초의 이와시 도매야 무라타 하루도 택에도 몸을 의지해, 하치초보리 여력·카토 지오를 비롯해, 많은 문인들과 함께 국학의 길을 연구했다(@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