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

채녀가하라

『에도 명소 도회』채녀가 원국립국회 도서관 디지털

현재 긴자 5가 부근입니다.

1724년(1724)까지 이 땅에는 마츠다이라 채녀 정정기(마츠다이라 우네메의 쇼사다모토)의 저택이 있었습니다.같은 해에 화재를 당해, 저택은 코지마치 산쵸메에 옮겨져 빈터가 되었습니다.관직명 「채녀정(우메노쇼)」에 연관되어 빈터는 채녀가하라라고 불렸습니다.우네메 마사(우메노카미라고도 함)은 천황황후에 가까운 식사나 주변을 돌보는 채녀라는 여관을 담당하는 관공서의 장관입니다.

이 채녀가 하라에 마치야(상점)와 바바를 마련하고 싶다고 신청한 것이 타치바나쵸 4가(현 동일본바시 3가 부근) 하치로베에점의 충병위였습니다.이러한 제안을 할 때에는 뭔가 막부의 이익이 되는 조건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충베에는 세운 마치야의 수입으로 바바의 수복이나 청소까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신규의 마치야 건설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만 상업 바닥을 마련해 그 수입으로 바바의 관리 비용을 내는 것이 허가되었습니다.

그림의 한가운데 직사각형으로 널리 그려져 말이 있는 곳이 바바입니다.말을 빌릴 수도 있었다.오른쪽 위의 다리가 만년교, 만년교 끝에 한층 큰 지붕이 보입니다.쓰키지혼간지입니다.바바를 따라 만년 다리의 밑까지 쭉 오두막걸이(연극이나 견세물의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가 오두막)이나 갈대(요시즈)나 멍(오히려)의 작은 연극, 조루리, 강석사, 미즈차야, 양궁점(작은 활을 쏘고 노는 가게), 낚시 선숙, 사자에의 똥구이, 이나리 스시, 두장(마술, 곡예, 모노마네를 하는 사람) 등이 처마를 늘어놓아 번창했습니다.낮에는 활기찼지만, 밤이 되면 근처는 고요하고 목에만 흰 가루를 젖은 백수로 불리는 야타카(매춘을 위해 츠지에 선 가창)가 어둠에 나타나는 그다지 풍기가 안 좋은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채녀가하라

『에도 기리 그림책』 가나가 2 국립국회 도서관 디지털

절화도(지도)로 위치를 확인해 둡시다.오른쪽이 북쪽, 왼쪽이 남쪽입니다.녹색 〇로 둘러싸인 곳이 바바입니다.바바 바로 동쪽에 걸려 있는 것이 만년교만년교를 건너면 지도에서 붉게 칠해져 있는 츠키지 혼간지가 있습니다.명소 도회에서 바바 너머에 훌륭한 담에 둘러싸인 넓은 토지가 있습니다.지도에서 확인하면 호소카와 에치나카모리의 저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호소카와 에치나카모리의 저택 자취는 현재 가부키좌가 있는 근처입니다.

 

오치마하는 무사

낙마하는 무사채녀가하라

명소 도회를 확대해 보면 낙마하고 있는 무사가 있습니다.말의 연습이니까 낙마 정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당시의 무사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무사에서도 기마가 허용된 것은 이백석 이상의 무가뿐이며, 마술 훈련이 의무지워졌습니다.태평한 세상이 계속되어 싸움에서 말을 타지도 않게 되면 말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게다가 에도 중기 이후는 물가가 급등해 무가가 경제적으로 곤궁해, 이백석 잡기로 말을 기를 수 있는 무사가 적어졌습니다.거기서, 바바에 가서 말을 빌려 연습해 공용시에 승마해 체재를 정돈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보다 위가 높은 무사가 위의를 바로잡기 위해 탈 텐데 평소에 타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낙마하는 것을 그림에 쓰고 마을사람이 보고 슬쩍 웃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샤쿠시 바바 후미코

1757년(1757)에 채녀가 하라에 오두막걸기까지의 2년간 강석사로서 활동하고 있던 것이 바바 분코입니다.에도 명소 도회가 그려진 무렵보다 20년이 경과하고 있어 바바의 규모도 축소되고 있었습니다.이에 따라 오두막집도 줄어들고 있었습니다.그래도 여전히 콩장이나 조루리의 오두막은 남아 있었다.분코 강담의 오두막도 그 중 하나였겠지요.

바바 분코는 1718년(1718)에 이요의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재수를 그만두고 출가해 승적에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그 후 환속해 에도에 나와 니혼바시의 마쓰시마초(현 니혼바시 인가타마치)에 살고 바바 후미코와 자칭 강석사가 되었습니다그는 배우는 의욕이 넘치고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고전, 불전, 한적 등을 비롯해 잡학이 풍부하고 다양한 저서도 저술했습니다.그러나 책의 내용은 후미코 자신의 호불호와 독설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채녀가 원에서의 강담에서는 당시에도 있어서는 받은 심학(선을 수습해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것을 말한, 평이한 실천 도덕의 가르침)을 풍자해, 분노한 심학자가 문경에 논쟁을 걸었지만 이겨낼 것이 없었기 때문에 평판이 높아지고, 오두막은 만원이 되었습니다

분코는 평범한 집 근처를 빌려 야강을 열기도 했습니다.그에게 있어서 인생 최대로 마지막 대사건이 일어난 것은 1758년(1758) 니혼바시 구레 마사(현 니혼바시 3가) 코마물 도매상 분장이라고 하는 상인의 집에서의 야강에서 일이었습니다

이 닛분코는 「진설 숲의 물방울」이라고 제목을 붙여 강담을 실시했습니다.내용은 미노국군 가미번에서 일어난 군상 일규에 대해서였습니다.연공의 증세에 대한 농민 봉기가 공의 고관의 부정 뇌물수수에까지 발전해, 봉기를 일으킨 농민뿐만 아니라 번주 가나모리 요리니시키(보다카네), 막부의 계정 봉행, 노중 등도 처벌된 대사건입니다.번주 가나모리 요리니시키의 이름으로부터 가나모리 소동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분코는 이 사건을 『히라가나 숲의 물방울』이라는 제목의 초지에 정리하고 있었습니다.이 책을 바탕으로 강담을 실시하는 것으로 미나미마치 봉행소에서 동심이 강담 회장에 잠입하고 있었습니다이 시점에서 군상규 재판은 심의 중인 단계에서 결심하지 않았습니다.그런데도 공판의 예측을 하고 법정의 밀의까지 상상해 마치 결과를 암시하는 것 같은 책을 쓰는 것은 괘씸하다는 이유로 잠입 수사였습니다.

이날 청중은 200여 명.강담이 끝나고 청중이 해산한 후문고는 대기소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봉행소의 동심이 「어용」이라고 말을 걸려고 했습니다.분코가 도망치지도 몰라서 식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 그것을 들은 동심이 난심기 다르다고 폭언을 했습니다.각각이야말로 광기자로 보거나 비웃는 자약으로 줄을 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동심과 문경의 발언은 「바바바 분경집」인 채)그 후의 봉행소의 조사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정도 비판을 했습니다.책이나 강담의 내용뿐이었다면 토시마에서 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법정에서의 언동에 의해 시중 도맡아 윗목 옥문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채녀가 하라에서 강담을 처음으로 2년.향년 41세.강석사로서는 이례적인 중죄였던 것 같습니다.

 

 

 채녀가하라

화면 중앙이 하루미 거리.만년 다리를 등지고 있습니다.오른손에 가부키좌의 파풍(삼각형 지붕)이 보입니다.하루미 거리를 사이에 두고 앞 가로수 앞 가로수 앞의 초창차색의 빌딩(사진에서는 검은색으로 보이고 있습니다)을 포함한 줄 건물 근처가 바바가 있던 장소입니다

바바는 해마다 축소되어 막부 말기를 맞이해 소멸했습니다.

바바 분코가 주인공의 역사 소설 「코키노 시즈쿠」를 사와기 코타로씨가 아사히 신문 토요일판 be에서 연재중입니다.흥미가 있는 분은 꼭.

【참고문헌】

『긴자의 시정 2』 히라노 요마오 시라카와 서인

『에도 도쿄 풍속 지리 제2』 다무라 에이타로 오야마카쿠 출판

『에도의 교육과 육아』 나카에 카츠미 쇼덴샤 신서

『에도를 산다』스기무라 소노코단샤 문고(이 중의 「강석사 바바 분코의 죽음」)

『희작자 명전』 이노우에 히사시치쿠마 문고(이중의 『바바바 분코』)

 총서 에도 문고 12 『바바바 분경집』 국서 간행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