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오 바쇼와 여행하는 에도시대
안녕하세요.활성 활동은 잠시 쉬는 Hanes (하네스)입니다.
조금 전의 이야기가 됩니다만, 5월 16일은 일본 여행의 펜클럽이 1988년에 제정한 「여행의 날」이었습니다.
「잊기 쉬운 여행의 마음을, 그리고 여행자는 무엇인가라는 사색을 다시 한번 묻는 것」을 목적으로 한 날입니다.
그 때문에 SNS에서는 과거에 관광 여행으로 방문한 장소의 사진을 올리는 등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없는 때이기 때문에 투고가 많이 있습니다.
본 블로그의 독자분 중에도, 관광 여행을 좋아하고, 현재는 자숙하고 있는 분이 비교적 많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 5월 16일이 여행의 날인가?
조사해 보면, 아무래도 1689년 3월 27일(현재의 달력으로 1689년 5월 16일)에 마츠오 바쇼가 「안쪽의 길」의 여행에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마츠오 바쇼는 이웃 고토구의 후카가와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행동 범위는 넓고, 주오구에도 그의 구비나 그가 읊은 하이쿠가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을 통해 에도 시대를 여행해 보지 않겠습니까?
(탑의 사진: 채다암터(후카가와)/안쪽의 길의 여행을 떠나기 전, 주거로 하고 있던 바쇼안을 놓친 바쇼는, 잠시 여기서 문인과의 이별을 아쉬웠습니다.)
니혼바시
본 블로그에서도 선배 특파원 여러분이 소개해 온 대로, 니혼바시무로마치에 있는 니혼바시 후나사에는 마츠오 바쇼에 관한 비가 있습니다.
여기는 이가 우에노에서 상경해 온 바쇼가 37세까지의 8년간 살았던 세입자가 있던 장소
당시의 니혼바시에는 어시장이 있어, 바쇼가 살았던 오다와라초에도 생선가게가 늘어서 있었습니다.
당시 모모아오로서 배우단의 밑바닥을 하고 있던 그가, 종장으로서 독립한 다음 해의 1679년의 정월에 읊은 「발구야마츠오 모모아오주쿠의 봄」이 여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춘의 심의가 나타나고 있어 배우 장인생의 발구라고도 해야 할 강력함이 있는 자기 확립의 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세구 「여행에 병들어 꿈은 고야를 둘러싼다」와 대비하면 그 차이는 분명합니다.
그럼 여기서 조금 동쪽으로 이동해 봅시다.
핫초보리
지금까지 긴자의 야나기 기사에서도 등장했습니다만, 카메시마바시의 밑에는 마츠오 바쇼의 구비가 있습니다.
새겨져 있는 구절은 국화꽃 피면 돌집 돌 사이.
전술한 발구와 크게 달라져 이쪽은 만년에 해당하는 1689년 가을에 핫초보리에서 읊은 것.
당시의 핫초보리 부근에는 배에서의 운반에 편리하다고 하는 것으로 이시야가 많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언뜻 고들고 살풍경한 돌집 작업장의 석재 사이로 국화가 저절로 피어 있다...바쇼는 그런 정경을 읊었습니다.
니혼바시의 생선가게 다음은 핫초보리의 이시야
주오구 내의 각 지역이 에도 시대에는 어떤 특징을 가진 장소였는지가 바쇼의 하이쿠나 인생에 주목하는 것으로 서서히 보였습니다.
그럼 새로운 발견을 찾아 다음 장소로 이동해 봅시다.
신오하시
계속해 온 것은 간토 대지진 때에도 불타는 일이 없고, 많은 인명을 구한 것으로부터 '인조교(도우교)'라고 불리는 신오하시.
후카가와에 「바쇼안」을 짓고 있던 바쇼는, 신오하시 완성간 근근의 1693년 겨울에 「첫눈이나 걸림돌 다리 위」라고 한마디.
게다가 같은 해 12월 7일의 완성 직후에는, 그 건초를 본 기쁨을 「감사하게 받고 밟는 다리의 서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쇼는 젊은 시절, 간다 가미미즈의 수도 관리에 관여하고 있었다고도 말해지고 있어, 다리나 수도 등의 공공 공사에는 관심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스미다가와에 다가온 곳에서 조금 남하해서 섬으로 건너가 보고 싶습니다.
쓰쿠다
기행문 「노자라시 기행」에 수록되고 있는, 백어의 본고장·이세만의 쿠와나의 해변에서 읊은 유명한 구에 「아케보노야 흰 물고기 하얀 일치수」가 있습니다
초안은 「눈박해 흰어 시라키 일치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퇴고를했기 때문에 계제가 겨울에서 봄의 새벽으로 바뀐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 구입니다.
일견 주오구에 관계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주오구 관광 검정에서도 자주 출제되고 있는 중앙 구민 문화재 백어 헌상 상자는, 그 이름대로 백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문화재의 배경을 간단하게 사죄하면, 이에야스가 에도에 입부했을 때, 섭진국으로부터 불러온 쓰쿠시마의 어부들이 에도 앞의 백어를 헌상했는데, 이에야스가 매우 기뻐했기 때문에, 그 이후 매년 백어를 헌상하게 되었습니다.
어기인 겨울부터 봄에 걸쳐 야간 수백 척의 배를 내어 백어를 포획한 모습은 가부키 '미인요시 산토바 백랑'의 아가씨 요시조의 명대사 '달도 몽롱하게 백어의 화도 희미하게 취할까 …에 남겨진 거리.
(츄오구의 불길과 오사카시 니시요도가와구의 불길의 관계에 대해서는, 「【소풍 시리즈 제9탄】어민이 맺은 인연의 섬」을 봐 주세요.)
그런 에도시대에는 흰살 생선이나 전갱이, 고등어 등의 청물이 중심이었으며, 초기에는 서민이 입에 할 수 없을 정도로 흰 물고기는 고급이었습니다.
게다가 붉은 몸의 가다랭이도 또 거의 입을 수 없는 대접이었다고 후지이(참고 문헌 참조)는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첫 가다랭이는 현재의 샐러리맨의 한 달의 급료로도 살 수 없었다.
그 상황하에서 바쇼는, 「가마쿠라를 살아 나오는 초가다랭이」라고 읊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기가 되면, 유행해, 에도코의 장사 능숙이나 질리함도 도와, 고바야시 이치차에 의해 「오에토나 개도 있어 붙는 첫 가다랭이」라고 읊어질 정도로...
같은 에도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처음 가다랭이의 취급이 바뀌어 버리다니 놀랐습니다.
하이쿠를 비교하면, 당시의 유행이나 생활까지 보이기 때문에 재미있네요♪
반가이편
마츠오 바쇼의 문하에서 쇼몬 십철의 혼자로 꼽힌 다카라이 기각의 주거터가 니혼바시 지바초에 남아 있습니다.
바쇼의 사후, 그는 에도코 기질을 반영한 화려한 구풍으로 인기를 끌고, 에도자라고 불리는 일파를 일으켰습니다.
「에치고야에 키누사쿠 소리나 의갱」, 「일의 봄을 과연 학의 걸음야」, 「종 하나 팔리지 않는 날은 에도의 봄」등, 계절감이나 생생한 에도시의 모습이 전해지는 하이쿠는, 현대에서도 에도 시대의 설명을 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오소리니
마츠오 바쇼의 구비는 주오구내에 한정하지 않고, 여행지에서도 보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하나하나 구비를 차분히 보지 못한 것도 사실.
그러나, 이렇게 복수의 구를 읊은 배경을 포함해 아는 것으로, 하이쿠에서는 계절이나 읊은 장소의 특징이나 당시의 생활 사정도 알 수 있다고 알았습니다.
에도 시대의 역사를 풀어내는 데 있어서, 이정표가 되는 바쇼의 구의 재미를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자유롭게 거리 걸을 수 있게 되면, 다시 바쇼의 구비나 그의 하이쿠에 시전된 장소를 둘러싸고 같습니다.♪
【참고 문헌・웹 사이트】
후지이 카츠히코 「에도마에의 본안: 놀다・먹고・낚시를 했다」(문예춘추사, 2014년)
야마나시 현립 대학 “바쇼 하이쿠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