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오구 역사 소요 <15>히구치 이치바와 아버지~마을 봉행소의 하치초보리 동심이었다~
메이지의 여성 작가 히구치 이치바의 아버지는 에도 막부 나오키의 무사였다.아버지·히구치 노리요시(오요시, 위노스케 모두)는 야마나시현 오토무라(현 고후시 시오야마)의 출신으로, 테라코야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1857년(1857), 26세 때 에도에 나가 반소 조소(막부의 서양 학문소)에 채용되었다.그 후, 오사카 등에서 일한다.
1867년(1867) 5월 16일부로 미나미마치 봉행 배하의 하치초보리 동심·아사이 다케조(30와마 2명 부지)의 주식을 매입한다.대가는 동심주 100량과 아사이가의 부채분 300량의 합계 400량으로 이 중 250량은 50년 분할부였다고 한다.동시에 하치초보리구미 저택지의 100평을 취득해 히구치 다메노스케라고 자칭한 것 같다.
상도 「핫초보리구미 저택지 호소미도」에는 아사이가(화살표)의 기재가 있다.현재 위치는 니혼바시 가야바초 2초메 부근.속속대관 저택에 있던 미나미마치 요력·니스기 야에몬의 부하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하치초보리 동심이 된 그해 10월에는 다이마사 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와해되었고, 이듬해 1868년 5월에는 마을 봉행소도 폐지되었다.아버지 히구치 노리요시가 무사였던 것은 불과 1년 미만으로, 100량의 거금 지출을 안고의 대전기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도쿄부의 관리가 되면서 부동산·금융업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메이지의 변혁기에서 부동산 매매도 활발해 인플레이션으로 이사야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히구치 이치바의 탄생
1872년(1872) 3월 25일(서기 5월 2일)에 히구치 이치바가 태어났다.장소는 고바시 내 도쿄 부청지, 구 고리야마 번 야나기하라 저택터.도쿄부 제2대구 이치코구 우치유키초 고몬나이 제일 저택현재의 지요다구 우치유키초 1-5-21사진상은 지요다구의 우치유키마치 홀 옆에 있는 히구치 이치바 탄생지의 설명판이지만, 촬영시에는 반면이 완전히 벗겨져 문면은 읽을 수 없었다.오른쪽 사진은 국회 도서관 “근대 일본인의 초상”에서
이치바는 히구치 가문의 차녀로, 「나츠(나츠)」라고 명명되었다.장녀 후지, 맏형 이즈미타로, 차형 토라노스케, 삼녀 쿠니코의 5명 형제 자매였다.
1876년(1876) 4월부터 1881년(1881) 9월까지, 이치바가 4세부터 9세까지 약 5년간은 혼고에 살았다.토지 230평에 45평의 건물에서 큰 벚꽃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사쿠라기의 숙소"라고 불렀다고 한다.행복한 삶이 엿보이는 것 같다.
1886년, 이치바 14세 때, 학문에 열심인 아버지의 권유로 가인 나카지마 가코의 「하기의 사토」에 입문해 재능과 인품이 인정되었다.
1884년경부터 일본은 불황이 심해져 갔고, 도산이 많아지고 있었던 것 같다.히구치가도 괴로워진다.1887년, 아버지는 57세에 경시청을 퇴직.2년 후인 1889년 7월, 노리가 59세로 병사한다.
요절의 카즈바
형 이즈미타로의 병사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병사가 계속되어 1889년(1889), 이치바가 17세의 젊은 나이로 호주로서 일가를 담당하게 되었다.
19살 때, 작가 반이 도미즈로부터 소설의 지도를 받는다.점차 소설을 발표하지만 수입은 적고, 빚이나 전당포에 쫓겨났다.1894년 12월부터 1896년 1월까지 히토바가 22세부터 24세까지의 1년 남짓 사이에 ‘큰 고모리’ ‘타케쿠라베’ ‘니고리에’ 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이윽고 명성이 높아지고 후세까지 이어지는 불후 명작이 탄생했다.그러나 일엽에 폐결핵 증상이 나타나 1896년 11월 23일 24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장례식은 츠키지혼간지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현재, 이치바의 시체는 츠키지 혼간지 와다보리 묘소(스기나미구 에이후쿠)의 히구치가 묘소에 잠들어 있다.게이오선·이노가시라선 명대마에역 근처의 묘소에서 입구에서 쓰키지 혼간지 연고의 쓰쿠시마 주민의 묘소를 지나 조금 옆으로 들어간 곳에 있다.사진 위에는 히구치가 묘소, 오른쪽은 와다보리 묘소(@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