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쿠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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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고쿠바시・료고쿠코지・고쿠가와로이」에 대한 설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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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켄보리후동인
가와사키 대사의 도쿄 별원·야쿠켄보리 부동원은, 옛부터 메구로, 메지로와 늘어서 에도 3대 부동으로서 알려져 「에도 명소 도회」를 비롯해 많은 문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미모토존(부동 명왕)은, 숭덕천황의 대, 1137년(1137)에 진언종 중흥의 조라고 불리는 흥교대사·각완(카쿠반) 상인이, 43세의 액년을 무사히 뿌려진 사례로서 일도삼례 경각되어 기슈·네라이지(네고로지)에 안치된 것입니다
그 후, 1585년(1585), 도요토미 히데요시세의 병화를 당했을 때, 네라이지의 대인 승도(다이나소즈)는 그 존상을 수호해 카츠로(쓰레라)에 납부해, 그것을 짊어지고 루바루 동국으로 내려갔습니다.그리고, 스미다가와의 곁에 유연한 영지를 집어넣고, 거기에 도우를 건립했습니다.이것이 현재의 야쿠켄보리 부동원의 시작입니다.
그 후, 1892년(1892)부터 가와사키 대사의 도쿄 별원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또한 순천당의 학조라고 불리는 사토 야스시연이 1838년(1838)에 화란(네덜란드) 의학학원을 개강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야쿠켄보리 부동원은 강단과 연고가 깊고, 1982년 5월에 이치류사이 사다카 선생님에 의한 제1회 봉납 강담 「야마우치 이치토요의 아내」가 행해진 이래, 매월 28일의 부동님의 연일에는 봉납 강담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가와사키 대사” 사이트에서)
준텐도 발상지
1838년(서기 1838년)
준텐도 시조 사토 야스이미 이 땅에
와란의학학원을 연다
1982년 4월 10일
학교법인 준텐도
고단 발상기념지비
유래의 기
모토로쿠의 옛날, 아카마츠 기요사에몬은 아사쿠사 미츠케베의 마을 츠지에서 태평기를 강구해, 에도 강석의 발상이 되었다.이것이 후에 「태평기 강석장」으로 발전해 오랫동안 서민에게 사랑받고, 안정 연간 「태평기장 기원지비」가 세워졌다.이 비는 그 후, 당부동원 경내로 옮겨져 1923년 간토 대지진까지 명물이 되었다.
이번에, 당부동원과 강단 협회와의 인연에 의해, 진언종 종조 홍법대사 1천백50년 원기를 기념해, 의지해 고바에 새롭게 건비를 이루는 것이다.
오소 타카하시 다카텐센쇼
고호대사 1천백50년 소원기념
오모토야마 가와사키다이시 히라마데라
1984년 아키요시상
도쿄베쓰인야쿠켄굴부동인
고단 협회 다케노
납입노나이의 이치노비
비인의 기
멀리 에도시대 중반부터 에도의 거리에서는 12월에 들어서 각지에서 나이의 시가 섰다.
나이의 시란 몬마츠 조나 장식 하코판 등의 정월 용품을 파는 시를 말하는 한때 도쿄의 나이의 시는 12월 14일 15일의 후카가와 하치만에 시작 아사쿠사 관음 간다 묘진 시바의 아타고 신사 히라카와 유시마의 료텐진을 돌아 마지막은 28일의 야쿠켄굴 부동존으로 끝 특히 이 시를 야쿠연보리 부동존납메의 나이의 시라고 불린 처음의 분재가 매화 장식의 시라고도 부르고 있던 전전은 수십채의 하코 이타야가 부동원문 앞에 늘어 요코마치에는 신부구 우스키마나가 출점해 당시의 풍광이 출점해초등학교의 정서가는 「하노초등학교의 정서가 터진 세미에 팔려진 세미노초등학교의 정서가
앞의 대전의 무렵은 전화의 확대와 함께 일시 중단해 버려 전후 어떻게든 부활시켰지만 시세에 맞지 않는 한편이었다.
시간이 옮겨 간신히 1965년 현지의 마을회 상점회의 유지가 꼭 에도 이래의 전통 행사 시모마치의 풍물시를 제대로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야쿠켄보리 부동존세의 시 보존회」를 조직해 동시에 인근 도매상가와도 협찬해 의류품 일용 잡화 등을 시가의 반액으로 판매하는 「대출고시」를 병최하게 되어 고심 경영 끝에 최근이 되어 간신히 왕시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던 고맙습니다.
또 생각해보면 전쟁전 전후를 통해서 본원의 오모토산인 가와사키대사 히라마지의 두꺼운 가호를 일관되게 받은 것도 부흥에의 명기해야 할 사항이다.
올해는 대출고시를 병행사해 정확히 30년의 고비에 해당하기 때문에 나이의 시 부활에 정열을 불태운 선인들을 추모해 이 마을의 오늘까지의 나이의 시에의 지나가는 쪽을 이 비에 고정 하나의 증거로 한다.
1996년 4월 15일
야쿠켄보리후도손
나이의 시 보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