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 타다 케이·별을 보고 걸은 남자
이노 타다타카는 노부나가·히데요시·이에야스 등과 함께 일본 국민에게 이름이 알려진 역사 인물이라고 한다.'처음 걸어 전국 지도를 만든 사람', '중고년의 별' 등으로 불리는 것은 여러분 아시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충케이가 말년에 거둔 장소가 주오구의 가야바초역 1번 출구 앞에 있다.이 장소에서는 그 『대일본 연해여지전도』의 작성도 행해지고 있었지만, 충경은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버린다.1818년, 지금부터 202년 전의 일이다.
죽고 나서 지도가 완성될 때까지의 3년 동안, 그 죽음은 덮여졌다.지도 완성의 공적을 충경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주위 사람들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런 일화에서 상상하면 충경은 주위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지바현 가토리시·사와라 공원의 충케이상 2018
다다타카의 인생
책을 몇 개 읽으면서 충경의 삶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①사하라에서 상인으로 성공한 시대
②에도에서 사사 타카하시 시기와 꿈꾸던 시대
③지도 완성을 향해 걸어온 만년
충경의 전기가 된 것은 틀림없이 1과 2의 경계선인 49세 때 에도에 나왔을 때이다.가독을 양도하고 은거, 공부를 좋아했던 충케이는 에도의 후카가와 구로에초에 자택을 두고, 막부의 천문방·다카하시 시(요시토키)에 제자에 들어갔다.
고토구 후카가와에 있는 주거터
한때에도 에도에 나왔을 뿐, 두 사람은 마치 제시한 것 같은 만남이었지만, 후에, 지난시 곁에 묻어 주었으면 하는 유언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부터도, 충경에 있어서 지난 시기와의 만남은 평생 한 것은 틀림없다.
타다케는 아사쿠사 천문대에 다니며, 흥미가 있던 역학·천문학을 배운다.그리고 점차 『지구의 크기를 알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하게 되었다.스승·지시에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 거리를 측정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는 마음대로 측량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시대.그러나 충케이는 자택에서 북쪽에 있는 아사쿠사 천문대와 사이를 보측하고 지구의 크기를 구하려고 했다.하지만 지구를 측정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다.
다이토구 막부 천문다이토
19세 연하인 지난 때는 그런 충경의 열의와 실력을 인정한다.그리고 당시 막부에서 현안이 되어 있던 에조지의 지도 만들기를 그에게 시키면 지구를 측정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두 사람은 '지구의 크기를 알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주하다.그리고 어떻게든 충케이는 에조지로 향하게 되었다.충경 56세 때이다(1차 측량)
표면상으로는 지도 작성을 위한 측량이었지만, 충경의 진정한 목적은 지구를 측정하는 것.흥미가 있는 것에 오로지 열중하고 있었다.보통 사람으로부터 보면, 매우 힘든 일처럼 생각되어 버리는 것이지만, 충경 자신에게는 노력을 하고 있다든가, 참을성 있게 한다는 의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여행의 어려움이나 스트레스는 오히려 즐거움으로 바꾸면서 할 수 있는 재료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의 측량 기술은 이미 사하라 시대에 길러져 있었다.그 방법은 극히 보통이었지만, 실무적인 장면에서 여러가지 궁리를 하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특징적인 것은 측량의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서 밤이 되면 별을 관측하고 있었다는 것.북극성 외에도 다양한 별을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월식이나 일식 등 천체 현상을 관측한 기록도 남겼다.
사하라의 구택에 있는 충케이상 2018
그렇게 태어난 지도는 막부에 평가된다.그 후 2차·3차 동일본 측량으로 발전해 위도 1도분에 상당하는 길이를 28.2리로 도출했다.
한편 지난시에는 충경이 제4차 측량을 하던 무렵에 서양의 새로운 천문서를 해독, 위도 1도 길이가 28.2리에 가까운 값임을 알고 충경이 내놓은 결과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충경과 지난시에는 눈물로 기쁨을 나눴다고 한다.그들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음과 동시에 만들어진 지도도 정확한 것이 입증되었다.
다카하시 시의 죽음 후
그러나 이 직후, 다카하시 지시가 급사해 버린다.해독 작업에 너무 열중했던 과로가 원인이었다고 한다.스승을 잃은 충경은 이때 어떤 심경이었을까.
다다케이와 지시의 무덤이 늘어선 우에노 겐공지
측량을 시작한 지 4년.
지도 만들기를 그만두는 타이밍이 있었다면 아마 이 때였을지도 모른다.하나의 꿈이 이루어지고 스승도 잃는다.나이도 들었고, 제자들도 자랐다.
유감스럽게도 그 근처의 심경은 책을 읽어도 몰랐다.하지만 측량을 거듭할 때마다 인정되어 가는 것으로, 흥미는 『일본 전국의 지도 완성』이라는 장대한 것으로 향해, 이미 마음의 준비도 갖추어져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분명 지도 만들기에 코다와리가 있어,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기쁜 일이 일어났다.제4차까지의 동일본 측량으로 완성된 지도가 장군 집안에 상람된 것이다.그 완성에 가즈미는 감탄했을까, 그 후에 막부로부터 따뜻한 손이 닿는다.
다다타카는 막신으로 징수되었고, 그 후 서일본의 측량은 막부 직할의 사업에.측량대원도 늘어나고 막부의 서포트도 두꺼워진 것이다.
이 큰 기회를 얻어 서일본의 측량에 헤매지 않고 돌진한다.제5차 측량이때 이미 60세였다.지금으로 말하면 85세 정도의 나이일까.
막부의 서포트 덕분에 방문하는 장소에서의 협력도 많아졌다.대원도 늘어나, 측량이 쉬워졌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의 오산은, 서일본의 측량에 시간이 걸려 버린 것.서일본의 해안선은 너무 복잡했다.이후 모든 측량이 끝날 때까지 13년이나 걸렸다.
이노도·현재의 시마나미카이도 부근
13년아주 긴 세월이다.
다다타카에 대해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지도 만들기를 계속하는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라는 곳.정말 좋아했나?듣고 싶다.
계속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특히 고독할 때.
좋아해도 그것을 일로 하면 솔직하게 즐길 수 없는 것이 늘어난다.6차, 7차, 8차로 회중하는 것으로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많은 이해자가 있었다.주위가 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다.주위가 있으니 계속해야 한다.사후에도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준 이해자.그런 이해자가 주위에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부러울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시켜 주는 것에 대해 매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야곶·마미야린조조상 2018
이노도의 홋카이도 북반분은 그의 측량에 의한 것
제10차 측량이 끝나고 이사하고 있던 카메시마초의 자택에서 지도 작성이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앞두고 숨을 거뒀다.3년 후에 《이노 다다타카에 의한》 지도가 완성.많은 협력자가 뒷받침된 만년이었다.
내년은 그 지도가 완성된 지 꼭 200년의 해가 된다.
우에노 겐코지 충케이의 묘
<참고도서>
이노 타다타카·일본을 처음으로 측정한 우직의 사람
호시노 유키야마가와 출판사 2010
이노 다다타카의 전국 측량
와타나베 이치로 이노 다다타카 연구회 2009
나와 이노 다다타카와의 만남
몇 년 전 사이타마에 있는 친정에 돌아가 옛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것이 나왔다.초등학생부터 고등학교 무렵까지 다니고 있던 이케부쿠로 선샤인 플라네타륨의 리플릿입니다.
그 무렵은 별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케부쿠로까지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다르다.처음 친구에게 데려가 주었을 때 본 갈릴레오의 이야기에 감동해 버려, 아마도 그러한 인간의 이야기를 또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철에 흔들리고 있었다.그럴 때 만난 것이 이노 다다타카저의 역사를 좋아하는 뿌리는 플라네타륨에서 만난 갈릴레오와 이노 타다타카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충경 얘기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충경은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지도는 걸어서 별을 보고 만들어졌다.그 정도
좋아했어야 할 플라네타륨도 어른이 되면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떠올리고 설마 이 나이에 꿈의 열쇠를 열게 될 줄은.그런 장소를 제공해준 이 블로그에 감사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