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신로쿠도 아버지나 형과 떨어져 동지 9명과 함께 아자부일이 구보에 있던 조후번 카미야시키에 수용되었다.・삼엄한 연말연시를 보낸 신로쿠들은 2월 4일에 할복을 신청했다.
조후번 측은 할복을 의식적인 것으로 보고 막부 관리들에게 제안을 실시하고 있다.
〔할복의 겨드랑이차의 일, 부채를 종이로 감싸고, 열개 챙기기기・・・・・〕(『모리가가 기록』
신육의 할복은 아홉 번째였다.번사 에라 기요시가 개착도를 잡는 가운데, 신로쿠는 주위의 의표를 찌르는 행동에 나섰다.
{간 신로쿠로는 피부를 벗지 않고, 앞에 삼봉(보물)을 두고, 겨드랑이차를 취하고, 배에 내밀었다고..}(『모리가가 기록』
아카호랑사들이 직접 복부를 자르는 일이 없는, 선복에 준하는 형태로 개착을 받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갤러리에게 있어서, 신로쿠의 최후의 모습은 경악해야 할 것이었다.장렬하고 격렬한 할복을 거쳐 간신로쿠는 24세에 지었다.
>그 밤에 신로쿠 이외의 9명의 낭자의 시신은 센다케데라로 옮겨졌다.・・・・・・
곧 나카도 부부(신로쿠의 누나 부부)는 신로쿠의 시신을 그들의 보리사이기도 했던 츠키지 혼간지 묘지에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센다케지에서는 시신을 후송된 오이시 우치조 등 45명과 마찬가지로 간신로쿠에도 계명을 하사해 함께 묘비를 세웠다.
>때는 지난 1928년 4월 8일, 아사히 신문의 한쪽 구석에 이런 기사가 작게 실렸다.
의사 유골이장
도쿄시 공원과에서는 츠키지 혼간지의 묘지에 있는 아카호 의사마 신로쿠로의 묘를 타카와 센다케데라로 옮기기 위해, 도쿄부를 향해, 그 허가 신청을 하게 되었다.즉 현 재간 신로쿠로의 무덤은 단지 비뿐이며, 유골은 츠키지 혼간지에 매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 후의 전말은 1929년 12월 15일 아사히 신문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의사 유골 실종
묘한 인연 동안 신로쿠로를 위해 토벌하는 날 위령
・・・・・
1929년 2월 13일, 구획 정리를 위해 혼간지의 묘지가 파헤쳐지게 되어,.. 파헤쳤지만, 묘석 아래에서 나온 것은, 젊은 용사의 뼈와는 비슷하게도 닮지 않은 뼈 항아리 두 개, ...
다른끼리의 사람은 유지대로 센다케지에 묻혀 사후에도 오랫동안 망군에게 봉사할 수 있었는데, 신로쿠로만은 유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14일의 위령제가 된 것이다.}
>현재는 약간 남겨지는 구형 사진에 의해서만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쇼와 초년 당시의 신로쿠의 무덤은 원록기의 매장 위치에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결국 간신6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은 채 그 후 묘석은 현재의 위치로 이동되어 갔다.
하지만 그 무덤과 흙으로 돌아간 유골은 주군 아사노 나가노키가 태어나 사건 당시 우에야시키가 존재하고 있던 땅에서는 가까이에 있다.단 한 명의 아카호랑사는 동지들과는 이단의 땅으로, 쿠엔에 번저와 주군의 사무라이의 임무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모노시리 백과'에서는 접할 수 없지만, 혼간지 경내의 공양탑에는 이러한 드라마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