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풍의 「닛와나다」는, 도쿄 산책의 고전이라고 여겨져 온 책이며, 「영대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카쿠시나가와의 경치의 버려진 것에 반해, 하선의 돛대와 공장의 연통의 총에 선 오카와구치의 광경은 때때로 서양의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취미에 비추어, 차후 모두 의외로 길게 혹은 일파의 시인을 즐겁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키노시타 모쿠타로 기타하라 하쿠아키 제도가의 어느 시기의 시편에는 츠키지의 구 거류지로부터 쓰키시마 나가요바시 근처의 생활 및 그 풍경에 의해 감흥을 발한 것 같게 생각되는 것이 아니었다.전혀 이시카와 섬의 공장을 뒤로 하고 얼마 척도 없이 범주를 이어 이카리 박는 다양한 일본식 화물선이나 서양형의 범전선을 보면 오노즈와 특종의 시정이 열린다.나는 영대교를 건널 때 활동하는 이 하구의 광경에 접하면 도오데가 세엔강을 왕복하는 화물선의 생활을 그린 가련한 그의 『라 니벨네에즈』의 한 소편을 생각해낸다.오늘의 영대교는 가장 빨리 타츠미의 옛날을 회상해야 할 누구도 없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대교의 철교를 소각한 아즈마바시나 료쿠바시와 같이 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새 철의 다리는 자주 하구 풍경과 일치한다.(13-334)
영대교는 최초의 다리는 1698년(1698)에 놓여 현재의 가교 위치보다 150m 정도 상류에 있었다.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목조교로, 매우 전망이 좋고, 여름에는 납량의 명소로서 알려져 있었다.그 후 사고 등으로 몇 번이나 교체가 이루어져 1897년에는 현재의 장소에 철교가 놓여졌다.그러나 이 다리도 간토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지진 재해 부흥 사업의 일환으로 1926년에 교체가 이루어졌다.(「츄오구 모노시리 백과」127쪽)
이 바풍의 「히와나다」는 1914년 여름 초부터 약 1년여 잡지 「미타 문학」에 연재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려져 있는 에이요바시는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현재의 것은 아니다.
현재의 영대교(2015년 9월 23일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