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대지진 발생 6년 6개월에 걸쳐 부흥한 도쿄는 제도 부흥 사업으로 새로운 도로와 함께 부흥 교량이 세워졌다.오늘날에는 영대교, 기요스바시가 국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이번에는 부흥 교량 설계에 심혈을 기울인 오타 엔조(오타·엔조)에 주목하고 싶다.
오타 엔조는 1881년(1881), 시즈오카현 다가타군 이토초(현 이토시 유가와)에서 태어났다.4세 아래의 남동생은 시인·극작가의 키노시타 모쿠타로(키노타·모쿠타로=본명 오오타 마사오)도쿄 테이 대학을 졸업 후 체신성 철도 작업국(훗날 철도성) 입국단나 터널이나 시미즈 터널을 담당해 천재 기술자로 평가된다.간토 대지진 부흥 사업에서는 제도 부흥원의 토목국장으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그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지요다구·간다바시키타즈메 서쪽 공원에 세워져 있다(사진상 왼쪽)비문에는 「매우 난사업이었던 구획 정리, 토목공사에 헌신적 노력을 했다」라고 있다.그리고 「1926년(1926) 봄, 심신피로가 끝날 때, 사업의 희생으로 아쉽게도 그 목숨을 끊었다」라고 이른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1930년(1930)의 부흥식을 보지 않은 채 45세에 세상을 떠났다.이 비는 당초 아이오이바시 반의 나카지마 공원에 세워졌지만 전쟁으로 손상되어 수복 후 현재지로 이전되었다.조각상의 배경은 기요스바시가 새겨져 있다.
나가요바시 유래판(사진상 오른쪽)이나, 영대교(사진 아래 왼쪽)와 기요스바시(사진하 오른쪽)의 중요 문화재 지정 기념비에는, 설계자로서 모두 오타엔3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영대교는 제도의 문·제일 교량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부근은 지질이 나빠 일본 최초의 압착공기에 의한 잠함공법으로 만들어진 남성적인 아치교기요스바시도 하부는 잠함공법이며, 여성적인 자이카리식 현수교가 되고 있다.이 두 교량은 경관 등 항상 대비된다.공법이나 구조에 당시의 기술을 결집한 교량일 뿐만 아니라 도시 미관을 창출한 디자인에는 오늘날에도 매료된다.
지진 전에 도쿄시가 관리한 교량은 600교 정도였으며, 부흥 사업에서 다룬 것은 약 460교에 달했다고 한다.그 중에서도 스미다가와에 가설된 교량은 부흥의 상징이었다.「스미다가와 부흥 6대교」라고 칭해진 것은 나가요바시, 기요스바시, 고마가타바시, 구라마에바시, 언문이교, 아이오이바시.이에 아즈마바시, 마구바시, 료고쿠바시와 지진을 견딘 신대교의 4교를 더한 것을 ‘10대교’라고 한다.스미다가와 각 다리는 디자인이 다르며 "다리의 전람회"라고도 불린다.
남동생 키노시타 모쿠타로는 「빵의 모임」을 시작해, 키타하라 시라아키, 요시이 이사무 등 당시의 문학·미술계를 장식한 인물들과 교류해, 프랑스의 센강에 마음을 모아, 스미다가와 강반의 요리점 등에서 이야기를 나눴다.형제는 스미다가와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마키부치 아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