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의 메구로 후동류센지 연일은 「단맛 축제」로 붐빈다.에도 중기의 유학자 란학자로, 「아마요 선생」인 아오키 쿤요는 여기에 묻혀 있다.기일은 10월 12일(음력)이지만 전후 연일에 맞춰 단조 축제가 열리게 됐다고 한다.니혼바시에서 태어나 하치초보리의 여력 저택에서 개학원했다.고구마 재배의 보급으로 기근을 구하고, 나아가 난학의 조조라고도 불리는, 주오구 연고의 인물이다.
쿤양은 『반쇼코』를 저술하고 단조가 구황작물에 적합한 것을 말했다.이 책이 8대 장군 요시무네에게 제시되어 막부 시책으로서 고구마 재배가 인정되게 되었다.1735년(1735)에 고이시가와 어약원·양생소 외, 여력 급지인 시모소마카무라(시모사마쿠와리무라=현·지바시 하나미가와구 마쿠하리)와 가미소부동당촌(현·지바현 야마부군 구주쿠리초)의 시작지에서 재배되었다.현재, 마쿠하리의 땅(「게세이 마쿠하리역」 근처)에는 「아오키 쿤요 시제지」(사진하 왼쪽)과 「현창」의 비가 있어, 지바시 교육위원회 설치의 설명판에 「・・・현재지(마쿠하리)만이 성공해, (중략) 마쿠하리에서의 단조 재배는 점차 늘어나, 천명의 대기근에도 단조 덕분에 아사자는 전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도로를 사이에 둔 반대편에는 ‘쿤양 신사’(사진 아래 오른쪽)가 있고, ‘고구마 신’으로 모셔져 있다.
요시무네는 서양 학문의 도입에 열심으로, 쿤양에는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했다.나가사키야에서 네덜란드 상관장도 면회하고 저작을 정리한다.마에노 료자와는 쿤양에서 네덜란드어의 수해를 받았다고 한다.그 결실은 『해체신서』의 간행으로 이어졌다.우리나라의 난학 연구는 쿤양에 시작된다고도 한다.1739년(1747)에는 평정소 유자가 된 후, 고비초 4초메(현 가부키자 우사마 앞 부근)에 저택을 배령했다.1769년(1769) 72세의 나이로 생애를 닫고 메구로 후도 류센지에 무덤(나라 지정 사적=사진상 오른쪽)이 있다.●마키부치 아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