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의 범위는 고후우치라고 불린 주홍내와 마을 봉행 지배의 묵인내와의 2개의 구분이 있었다.이 영역에 무가지, 마을, 사찰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넓이는 어느 정도였을까.자료에는 「1869년(1869)의 토지 이용 상황 조사에 따르면 무가지(약 1170만 평)가 전체의 약 70%, 마을지(약 270만 평)와 사찰지(약 270만 평)가 약 15%씩...」(『에도박람강기』초등학교관, 2007/6)라고 있다.조사 시기는 메이지 시대이지만 막부 말기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다.
거기서
게다가 인구를 보면, 에도의 인구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고, 여러 설도 있지만, 개괄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약 100만 명으로 하면, 그 중 마을 사람은 약 50만 명으로 여겨진다.
에도의 약 15%인 약 270만 평의 마을에 50만 명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즉, 현재의
이것만으로도 놀랍지만, 에도 서민의 대부분은 나가야 생활이라고 하기 때문에, 얼마나 과밀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좁지만 지혜를 내고, 활기차게 생업에 힘쓰고, 살고 있던 씩씩한 모습이 느껴진다.(사진은 후카가와 에도 자료관의 나가야 풍경=동관은 2009/7부터 약 1년간 개장 공사 때문에 휴관)
오늘의 주오구는 맨션 거주 세대율이 일본 제일로 되어 고층 맨션이 늘어서, 부지의 입체적 이용이 도모되고 있으므로, 거주 공간은 에도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그러나 에도기 마을의 삶을 현재의
츄오구는 에도의 오시로타마치로, 「원조시타마치」인 니혼바시·쿄바시의 마을지는 상업지, 직주지 등으로서 수많은 직종의 사람들로 활기를 보이고, 에도 번영의 원류가 되어 간다.그리고 「사람이 살고, 사람이 모이는 곳, 활기찬」의 몸을 만들었다.오늘의
■지금까지의 「츄오구 여기에 역사 있다」
제1회 “지금도 있는, 영안지마” 이쪽>>
제2회 「교차로에 남는, 지금 없는 다리」 이쪽>>
제3회 “구내에서 가장 높은 곳” 이쪽>>
제4회 “니혼바시의 숨은 명판” 이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