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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오구 여기에 역사 있어 (40)지진 재해 부흥 사업을 되돌아보는 -1 <도로 명칭편> - 하루미 거리는 가부키 거리였다.

[마키부치 아키라] 2012년 3월 22일 08:30

지금부터 82년 전인 1930년(1930) 3월 26일, 「지진재 부흥 기념식전」이 개최되었다.1923년(1923) 9월 간토대지진(關東) 대지진 발생 6 6개월에 걸쳐서야 도쿄가 되살아났을 때다.고토 신헤이로 상징되는 제도 부흥 사업은 도시 개조라고도 하지만 구획 정리하에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었다.고난을 극복한 사업은 오늘의 도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이번에는 부흥도로의 명칭에 접해보고 싶다.

 

0913_40_120317daisinnsai_do.jpg식전 이틀 전, 24일에 쇼와 천황은 부흥한 시내를 순행했다.지요다 초등학교(현 니혼바시 중학교=히가시니혼바시 잇쵸메, 임행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에서는 점심을 먹고 옥상에서 부흥의 거리 풍경을 천람그 후, 부흥 교량인 기요스바시나 에이요바시를 거쳐 시립 츠키지병원(해군 군의학교 옆에 있던 도쿄 시립 최초의 종합병원=현존하지 않음) 등을 방문했다고 한다.

 

도로에 이야기를 되돌리면, 부흥 계획으로 신설된 쇼와도리, 야에스 거리 등의 도로 명칭은 도쿄 일일 신문사가 현상 모집한 것이었다.22 간선도로 명칭에 대해 24만 통 이상의 응모가 있었다고 한다.

 

당선된 새로운 도로의 명칭은 이하였다.주오구 관련 도로를 살펴보자.

 

1호선 - 쇼와도리(부흥 도로의 대표)폭원 100m 계획이 44m가 된다)

2호선 - 다이쇼도리(현 야스쿠니도리)전후 개칭.히가시니혼바시, 아사쿠사바시미나미변)

3호선 - 에이다이하시도리(현 영요도리)테이토 부흥 제1교량의 영대교)

4호선 - 가부키도리 (현 하루미 거리)가부키자나 고비키초, 신후자터)

5호선-기요스기도리(부흥 교량의 기요스바시도리 요코야마초에서 아사쿠사바시 부근)

7호선 - 야에스도리(외호리 거리에서 쇼와도리까지 도도, 그 앞은 구도)

11호선 - 신토키와도리(현 에도도리)신토키와바시나 부흥 초등학교의 도키와 초등학교)

12호선 - 시장통(현 신오하시 거리)지진 재해로 이전 개장한 쓰키지 시장)

13호선 - 신오하시도리(신오하시에서 고토 방면이후 구시장 거리와 통합)

 

덧붙여서, 다른 도로 명칭은 다음대로

6호선-고마가타바시도리(현 고마가타도리), 제8호선-센다도리, 제9호선-의원통, 제10호선-고토도리, 제14호선-마야바시도리, 16호선-후쿠사도리(현 가쓰니시바시 거리), 제17호선-기요사도리, 제18호선-창평통, 제19호선-아오바도리, 제20호선-시츠메도리, 제21호선-미츠메도리, 제22호선-쿠라마에바시도리

 

이처럼 지진재부흥도로는 오늘의 도로망의 초석이 되었다.●마키부치 아키라

 

 

 

◆츄오구 여기에 역사 있음(39) 3월 10일, 도쿄 대공습 67년 초토에서의 재생

[마키부치 아키라] 2012년 3월 8일 19:06

1945 3 10일, 도쿄는 대공습으로 직격되었다.올해는 67년차에 해당한다.이날 새벽, 시모마치 일대는 미군기의 습격을 받고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었다.공습은 3 10일만이 아니었다.무거운 폭격으로 주오구의 대부분은 소실되어 괴멸되었다.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늘어나는 가운데 공습 체험자는 이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그 전쟁을 보여주는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0913_39_120310tokyo_daikushu.jpg주오구 홈페이지(HP)에는 도쿄 대공습을 특집한 ‘츄오구 평화기념 가상 박물관’이 있다.중앙구 평화도시 선언으로 시작해 공습 피해 상황과 학동 피난 실태를 정리한 전쟁 기록, 사진 자료와 체험기를 소개하는 자료실, 당시와 현대의 대비 사진을 볼 수 있는 과거와 현대 등으로 구성돼 있다.

 

HP에 따르면 주오구에서는 194411에 처음으로 공습으로 피해를 입은 뒤 총 15회의 공습을 받았다고 한다.공습 피해 지역을 나타낸 주오구 전도를 보면 중심부의 대부분이 빨갛게 칠해져 있다.조금 피해를 면한 지역은 츠키지나 인형초의 일부와 스미다가와 남동부의 쓰키시마, 카츠도키, 하루미 지역이 되고 있다.

 

신카메지마바시니시즈메 남쪽에 '전재 조난 사망자 위령비'가 설치되어 있다(사진상 왼쪽)비문에는 「3 10일 공습에 의해, 전마치 소실시의 사망자를 위령한다」라고 새겨져, 1948년(1948) 310일에 지바초 니, 산쵸메마치회 유지가 건립한 것.

 

니혼바시 다리 위에도 소이탄이 덮쳤다.현재에도 그 태초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사진상 오른쪽=난간 측면의 갈색부)부지런히 부석을 보면 탄흔인지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곳도 발견된다.앞의 이시바시 가교 100주년에 있어서 행해진 세정 때에는 그 개소는 제거하지 않고 가능한 한 불타는 남겨 두었다고 한다.

 

주오구에서는 평화에의 소원을 담은 기념물 「평화의 종」(사진 아래) 「평화상 니콜라」 「에도코 또」 「평화도시 선언비」=3개 곳을 설치하고 있다.‘평화의 종’은 1989년 3월 야에스 거리의 중앙분리대에 설치됐다.높이 7m에서 네덜란드제 종이 26개 늘어서 울리고 있는 것은 주오구의 노래 「우리 거리」라고 하는 것.피라미드 부분에는 “지금 한 번 더 머물러 평화의 존중을 찾아보자...”라고 주오구 평화도시 선언이 새겨져 있다.●마키부치 아키라

 

 

 

◆츄오구 여기에 역사 있어 (38) 메이지 시대의 시모마치·츠키지계쿠마를 추억 - 가부라기 키요카타작《아사야스이》

[마키부치 아키라] 2012년 3월 4일 08:30

미인화의 거장 가부라기 기요카타는 어린 시절을 고비키초 근처에서 보낸, 주오구 연고의 일본 화가이다.전후도 없던 1948년(1948)에 그린 《조석 안거》는 1887(1887년) 무렵의 시타마치·츠키지 근처의 풍정을 회상한 것이었다.이 작품이 현재 가마쿠라시 가부라기 기요카타 기념 미술관에서 개최의 「수장품전 기요방과 무대 제1기」에 출품되고 있다(사진상)회기 3월 11일까지 월요일 휴관.

 

0913_38_120301kaburaki.jpg가부라기 기요카타(카부라키·키요카타)는 1878년(1878) 간다 사쿠마초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극작가·조노 토리키쿠교바시 미나미콘야초, 쓰키지, 고비키초와 이사.13세에 미즈노 겐에 입문.17세 때 아버지가 경영하는 '야마토 신문'의 삽화 화가가 된다.

 

1927년(1927) 제8회 제전에서 제국 미술원상을 수상한 《츠키지 아카시초》는 대표작이때부터 간토 대지진으로 잃어버린 시타마치 풍속을 그리는 작품이 늘어간다고 한다.

전후는 1948년(1948)의 제4회 일전에 《조석안이》를 출품1954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가마쿠라로 이사.1968년(1972)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묘지는 다니나카 영원

 

《조석 안거》는 길이 4m 정도의 그림책으로, 도쿄시타마치 서민의 생활의 한 장면을 아침, 낮, 저녁의 정경에 걸쳐 그리고 있다.아침의 경에는 배경에 돛대가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서 신문 배달 소년, 청소하는 소녀, 팥 팔고, 골목길에서는 우물 펌프고, 세면하는 남자들의 옆에는 나팔꽃이 핀다.낮 장면, 풍령 판매는 이동식 포장마차 안에서 햇볕을 피하고 있을까.

석경에서는, 멋진 여성의 행수, 램프의 불씨를 닦는 여성가게 행등을 둘러싸고, 인연대에서 이야기하는 노인, 석양의 성인, 여자아이는 제등으로 놀고 있다(사진하:《조석 안거》 중 석경(부분)=동관 간행 그림엽서로부터)

 

「1887년 무렵의 세상의 모습으로, 장소는 도쿄의 시모마치, 바다에 가까운 교바시 구 츠키지 근처의 아침에 시작되어, 하치초보리계의 밤까지의 풍물시이다」(『주부모기 기요카타 문집(一)제작 여담』)

 

청나라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전화가 남는 194870세 때였다.간토 대지진으로 메이지의 정경이 사라지고, 게다가 도쿄 대공습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에 옛날의 마음을 비추는 것 같다.「메이지의 세상에 도의 동남, 오카와의 물이 축지의 바다에 쏟아질 때까지, 그 일대의 아래 마을에 품은 나의 향수는 바닥 없는 우물에서 퍼지는 물의 몹시 다할 수 없다」(같은 저)라고 그 심경을 말하고 있다.

 

1934에는 《쓰키지강》을 간행했다.어린 시절을 보낸 키비치마치·츠키지 근처는 선명한 기억과 함께 영원히 사랑한 마음의 고향이었을지도 모른다.●마키부치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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