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라는 도시는 지금도 도쿄 만 입구를 향해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오다이바 앞바다에서 지금도 중앙방파제 외측 매립지의 조성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 사업은 1977년에 시작되어 아직 사업 중반입니다.이에야스가 매립을 개시하고 지금도 계속하는 이 사업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가면 쓰키시마에서 시작되었습니다.에도시대에는 육지로 호나 하천을 조성할 때 발생하는 토사를 폐기해 매립했습니다만, 메이지시대에는 해저를 준설해 발생한 진흙을 매립해 육지를 만들었습니다.
1892년(1892)의 도쿄만 미오준(미오사카사이) 사업으로 해저 진흙을 준해 쌓아 올린 것이 쓰키시마 1호지입니다.계속해서 2호지, 3호지(현재의 카츠키, 도요카이), 4호지(현재의 하루미)와 앞바다에 길게 늘려 갔습니다.이 미오준 사업은 동시에 스미다가와 하구 개량 공사이기도 했습니다.오랜 세월 스미다가와가 해저로 운반한 진흙을 제거하고 항로를 정비한 것입니다.
쓰키시마·쓰쿠시마의 강스에는, 전마선이나 타츠마선 혹은 발동기선 등의 배(하시케)이 많이 보였습니다.화물선으로 운반되어 온 물건을 대충이라고 불리는 비교적 큰 배로 집배해, 물건을 환적한 소교로 육양하면 강근을 수송합니다.다이쇼에서 쇼와에 걸쳐 도쿄시와 그 주변을 흐르는 하천은 69개 있어 수송에는 수운이 편리했습니다.수운에 종사하는 배의 수는 1927년(1927년) 말의 수상서의 조사에 의하면 11,290척으로, 배는 가구마다의 일장이기도 했습니다.인구는 31,036 명 (남성 20,600 명, 여성 10,436 명)이었으며, 그 중 절반 이상이 육상에 집이없는 수상생활자였습니다.직장이며 생활의 장소인 배는, 크고도 50톤, 소형에서는 10톤 이하였습니다.자는 방의 크기는 2~3첩이라는 작음이었습니다.이곳에서 가족 3명~4명이 생활하고 있었다.이러한 주민의 복리 후생을 실시하기 위해서 수상회관이나 수상학교(육상에 지어진 기숙 형식의 학교)가 세워진 것 외에 치안을 담당하는 수상 경찰서 등이 설치되었습니다.1927년 당시의 주오구(=니혼바시구·쿄바시구)의 정확한 인원수는 불명합니다만, 그래프로부터 하면 24만명 정도이니까, 수상생활자만으로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2018년 2월 현재의 쓰키시마 지구(쓰키시마·카츠도키·하루미)의 인구는 72,780명·세대수는 37,443입니다.주오구의 인구 (=157, 388 명) 4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어느 시대나 중앙구의 인구는 워터프론트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수상생활자 분들에게는 호적이 없는 사람도 많이 있었던 것 같기 때문에, 실제의 비율은 상기 숫자 이상이었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화물선의 컨테이너선화가 진행되어, 물류에 있어서의 배의 수요가 줄어 직주일체가 된 배는 감소해, 수상 생활자도 전직 등에 의해 격감합니다한편, 배의 폐선을 계류해 주택의 대체로서 이용하는 케이스가 많아졌습니다만, 1980년대가 되면 배의 노후화가 진행되어, 사용에 견딜 수 없게 되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